닥터 - K 지은이 : 곽경택 원작 / 김혜린 장편소설 출판사 : 성경 강지민은 자신을 지배하는 신기로부터 벗어나려 애쓴다. 그는 어머니와는 다른 삶을 살고 싶었다. 그리고 동생의 넋을 이제는 고이 떠나보내고 싶었다. 자꾸만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로 고통스러워하는 그에게 맑고 순수한 영혼을 가 진 여자, 새연이 마지막 남기고 간 선물, 그것은 사랑이다. [닥터K]는 시시각각 목을 조여오는 공포와 고통을 독특한 소재를 통해 흥미롭고 긴장감 있게 그려낸 뛰어난 의학스릴러이다. 1998년 12월 김혜린 주요인물 강지민:무당의 유전적 인자를 지닌 신경외과 레지던트 4년차. 그가 지나가면 싸한 비누 향기가 난다. 얼음처럼 차갑지만 깔끔하고 잘생긴 외모는 여성들로 하여금 호감을 느끼게 한다. 죽음에 이른 어린 환자들이 그의 수술실에서 살아난다. 표지수:마취과 레지던트 4년차. 의과대학 시절 강지민에 이은 차석 졸업자. 10년 동안 강지민을 지켜보면서 그의 인간적인 모습에 사랑을 느끼게 된다. 그에게 현실적인 사랑을 원한다. 오새연:맑고 깨끗한 외모를 지닌 19세 여자 환자. 강지민을 만나게 되면서 처음으로 사랑 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괸다. 그러나 그녀는 최악성 뇌종양의 터미널 상태 이석명:카리스마를 지닌 하버드 의대 출신의 신경외과 과장. 강지민이 의학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치료 행위를 하자 이에 의심을 가진다. 박호동:신경외과 내에서 실수와 사고투성이인 늦깎이 레지던트 1년차. 전혀 의사처럼 보 이지 않는 의사. 김현수:레지던트 3년차. 어떤 위급한 상황 속에서도 의국의 규칙대로 행동하며 강지민을 가까이서 돕는다. 남다른 능력을 가졌던 그를 인도한 것은 새연의 식어 가는 육체가 아니라 지극히도 한 순간을 간직하고 싶어했던 그녀의 영혼이었다. 이책을 읽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용어 AVM:동정맥 기형 스투퍼(stupor):혼미, 의식혼탁 라테랄로(lateral):외측, 측면 프론탈(front):전두 OP(operation):수술 페이션트(patient):환자 산대:죽을 때가 임박해 눈동자가 열리는 일 듀라 섹션(dura section):경막 절개, 안지오그램(angiogram):혈관 조영 사진 듀머(tumor):종양, 익스파이어(expire):끝나다, 죽다 인덕션(induction):도입, 유도(마취상태로 만드는 과정) 1 꽹과리, 북 그리고 징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무당이 흔드 는 방울소리까지 합세를 하여 그야말로 멀쩡한 사람의 혼까지 빼 놓을 것만 같은 굿판이 벌 어지고 있었다. 빙글빙글 돌아가며 춤을 추는 무당의 버선코가 유난히 뾰족해 보였다. 무당은 신명나게 뛰어오르다가 서슬이 퍼런 작두를 대령해 놓고서 그 위에 올라섰다. 작 두의 날을 얼마나 열심히 갈았는지 그 위에 종이라도 한 장 놓으면 그대로 둘로 갈라져 버 릴 듯 날이 번쩍 거렸다. 그런 칼날 위를 무당은 아무렇지도 않게 걷다가 뛰다가 춤을 추 다가 했다. 그녀는 죽어 가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열심히 춤을 추고 잡귀를 쫓는 문구를 읊기도 했다. 결국은 죽게 될 사람을 그녀는 사자들이 와서 데려가지 못하도록 지성을 다 했다. 어린 소년이 갓난아이를 업고서 무당이 춤추는 양을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소년은 안절부절못한 표정으로 왔다갔다 걸어다니며 가끔씩 아기를 치켜올렸다. 굿을 벌인 당사자 들은 고개를 숙여 연신 절을 해 대며 두 손을 모아 싹싹 빌었다. 굿을 하는 집 마당에는 마을 사람들이 빙 둘러서서 구경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마을 사람들이 무당 앞에 거적으로 둘둘 만 무엇인가를 내놓았다. 사람들이 우! 괴성을 지르며 무당에게 달려들었다. 그녀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 싸며 찢어질 듯한 소리를 질렀다. "헉!" 강지민은 악몽에 시달리느라 뒤척이다가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그는 신경외 과 의국의 간이침대에서 잠깐 눈을 붙이던 중이었다. 그가 정신을 차릴 때쯤 의국의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리더니 곧 소란스러워졌다. 다들 어 딘 가로 가는 모양이었다. 급히 뛰는 발걸음 때문에 어수선하고 시끄러웠다. 지민이 안경을 집어쓰자마자 3년차 레지던트 김현수가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 "강 선생님! 강 선생님!" 지민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응급 코마 환자입니다!" 지민은 벌떡 일어나 곧장 수술실로 달려갔다. 환자는 스트레치카로 신속하게 옮겨지고 있었다. 의사들이 뛰어가며 소리를 질렀다. "비켜요! 비켜!" 지민이 거기에 합류해 뛰어가면서 소리쳤다. "최 간호사. 마취과에 연락했나!" "네! 수술실에 대기중입니다." 환자는 이제 3세밖에 안된 어린 아이였다. 아이를 살려 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상태였다. 지민이 불쌍한 어린 생명을 따뜻한 두 손으로 감쌌다. '팟'하는 소리와 함께 X-ray 백색 형광판의 불이 켜졌다. MRI 뇌단층 촬영 사진들이 여 러 장 걸려졌다. 검은 색 바탕 위에 여러장의 사진들이 칸칸이 배열되어 들어있고 각각마 다 뇌 속의 구조물들이 다양한 명암으로 구분 지어져 있다.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의사들이 뭐라고 말을 주고받는 소리가 들렸다 의국장인 강지민이 지시봉으로 사진 속의 대뇌 중앙부를 가리켰다. 그는 딱딱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71병동 중환자실 열두 번째, 대뇌 중앙에 AVM이 발생해 9월 13일 입원한 환자입니다. 입원 당시 멘탈은 스투퍼로우스였으나 지금은 4번 드로우지 상태입니다. 라테랄로 10밀리, 프론탈은 약 15밀리 정도가 부어있었고 어젯밤 EVD는 144cc였습니다." 아침 컨퍼런스가 진행되는 중이었다. 깔끔한 외모에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는 강지민이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있었다. 안경 너 머로 눈이 총명한 빛을 발했다. 머리도 단정하게 빗어 넘기고 키도 훤칠한 그에게서 싸한 비누 향기가 났다. 그래서 병원에서는 그를 '비누'라고들 불렀다. 물론 그 앞에 두고 그렇 게 부르는 일은 없었다. 병원에서 그는 오직 환자를 치료하고 살리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에게 장난이 나 농담은 통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진지하고 바빴다. 환자의 상태가 상태인 만큼 실내의 웅성거리던 소리는 사라지고 침묵 속에 긴장감만이 흘 렀다. 지민의 정면에는 이석명 과장과 교수 3명이 앉아 있었다. 그 뒤로는 의사들이 다음 사진 을 챙기랴, 차트를 넘기랴 조용한 가운데에서도 분주하게 움직였다. 레지던트 3년차인 김현수가 걸려있던 사진들을 잽싸게 걷어 내자 몸집이 다소 뚱뚱한 레 지던트 1년차인 박호동이 둔한 몸을 허둥거리며 다른 환자의 사진을 덮어 끼웠다. 다른 사 람들도 피곤한 듯 머리엔 새둥지를 틀고 눈은 충형이 되어 있었다. 두세 명 정도를 빼고는 모두 안경을 쓰고 있었다. 그들은 열심히 손을 놀려 차트를 분리하고 봉투에서 MRI와 CT 사진 등을 꺼내어 전달하고 사진을 들어 형광등 불빛에 확인을 하고는 봉투에 번호를 써넣 었다. 그때였다. 사진들을 팔뚝에 불안하게 걸치고 있던 호동이 걸어놓은 사진이 빠지려는 걸 잡으려다가 팔뚝의 사진들을 우르르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요란스런 소리에 놀란 사 람들이 순간적으로 행동을 멈추었다. 호동에게 원망 어린 시선이 쏟아졌다. 그럼 그렇지 하는 비난의 시선도 섞여 있었다. 사 람들 사이에서 그는 덜렁거리고 지저분한, 잠자는 거지였다. 그는 두꺼운 안경을 쓰고 있었 고 머리는 감은 지가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한 가닥도 따로 분리해 낼 수 없을 만큼 기름으 로 떡이 져 있었다. 옷매무새는 정돈된 데가 한 군데로 없었다. 넥타이는 거의 풀어헤쳐졌 지. 더러운 와이셔츠의 소매는 되는대로 걷어붙여졌지, 바지는 구김이 하도 많아서 원래부 터 그렇게 만들어 놓은 구김바지 같았다. 호동을 얼굴이 달아오른 태 더욱 당황하였다. 평소보다 더 허둥거리는 그를 이 과장이 날 카로운 눈빛으로 지켜보다가 고개를 돌려 버리며 녹차 잔을 집어들었다. 잔이 놓인 테이블 유리에 형관판의 사진들이 반사되어 보였다. 이 과장은 이마를 찌푸렸다. 지민이 침착하게 호동에게 다가가 바닥에 떨어진 사진들을 집어 능숙한 손놀림으로 형광 판에 꽃았다. 호동이 머뭇거리다가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혼란스럽던 분위기가 다소 진정 이 되었다. 지민이 형광판 앞에 단정하게 섰다. 안경알이 불빛에 반사되어 그는 마치 흰색의 선글라 스를 쓰고 잇는 것 같았다. 그가 말했다. "71병동 중환자실 열세 번째, 어제 저녁 11시경에 응급실로 들어온 4세 된 남아입니다. 멘탈은 풀코마였으며 CT 촬영 결과 급성 뇌격막하 출혈이었으며 동공은 완전 산대 상태였 습니다. 새벽 1시에 OP를 실시한 후 중환자실로 옮겼습니다." 의사들은 여전히 바빴고 이 과장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들었다. 지민을 바라보는 그의 눈길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날카롭게 빛났다. ".... 동공이 완전히 산대에다 멘탈이 풀코마인데 OP를 했어?" 다들 찔끔하는 표정을 지었다. 서로를 쳐다보며 눈치만을 보고 있자니 실내는 찬물을 끼 얹은 듯 조용해졌다. 이 과장은 지민을 쳐다보았다. 지민이 시선을 피하자 그는 천천히 자 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왔다. 그는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지민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이 과장이 물었다. "불필요한 수술을 했겠구먼. 지금 멘탈이 뭐야?" 지민이 잠시 망설이더니 대답했다. "... 엘러트입니다." 이 과장이 놀란 눈으로 지민을 쳐다보았다. 동시에 뒤에 서 있던 다른 의사들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과장이 물었다. "그럼 청명 상태로 돌아왔단 말이야?" 지민이 대답했다. "예." 이 과장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OP 누가 했어?" 지민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제가 했습니다." 모든 시선이 지민에게 쏠렸다. 교수들이 일어나 사진을 보려고 앞으로 나왔다. 분위기가 다시 술렁거렸다. 뭔가 의심스런 눈길로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던 이 과장이 지민을 쳐다보았다. 지민은 살 며시 고개를 떨구어 아래를 보았다. 그러나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내 눈을 들어 이 과장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 과장이 출구 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오전 라운딩은 중환자실부터 돌지!" 그의 움직임에 따라 모두가 출구 쪽으로 향했다. 지민이 이 과장을 얼른 따라가서 말했다. "과장님! 오전에 주상례 씨 OP 잡혀 있습니다." 이 과장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입맛을 다시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참 그렇군! 오전에 수술 있었지... . NS 선생들이 둘씩이나 입원하니까 매일 수술이구먼. 강 선생이 회진 돌고 끝나는 대로 들어와!" "네." 의사들이 회진을 돌기 위해 우르르 방을 나갔다. 호동이 그 뒤를 사진과 차트를 잔뜩 싸 안고 허둥지둥 따라나갔다. 그들은 빠른 걸음으로 신경외과 의국의 간호사실 앞으로 지나 갔다. 첫 번째 병실로 들어갔다. 그들은 뒷머리가 심하게 헝클어져 잇거나 얼굴이 푸석푸석 했다. 그 중에서도 맨 뒤를 따라오는 호동의 머리 모양새가 가장 볼 만했다. 간호사실 데스크에 서 있던 수간호사가 얼른 빠져나와 회진 팀에 합류하는데 반대편에서 평상복을 입은 간호사 한 사람이 지민을 눈여겨보면서 걸어왔다. 그녀는 지민의 말쑥한 얼 굴을 계속해서 힐끔거렸다. 그리고 간호사실 데스크 안으로 들어가 다른 간호사와 서로 눈 인사를 주고 받았다. 두 간호사는 탈의실로 가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간호사가 지민 쪽을 턱으로 가리키면서 물었다. "'비누', 밤에 나갔다 왔니?" "아니, 새벽에 응급 코마환자 OP했어." 그 소리를 들은 상대편 간호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또 살았어." "진짜야?" 간호사가 대답 대신 고개를 조심스레 끄덕이고는 다른 간호사와 함께 탈의실로 들어갔다. 회진 팀들은 먼저 지민이 수술을 했다는 환자부터 찾았다. 기적적으로 살아난 환자는 맥박과 혈압이 극히 정상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가습 기에서 뿜어져 나온 김이 아이의 얼굴로 스멀스멀 퍼져 나갔다. 아이는 얼굴을 온통 붕대 와 시약으로 뒤엎은 데다가 퉁퉁 붓기까지 한 채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지민은 말없이 아이의 손을 쥐었다. 어린 환자의 침대 옆에서는 벽의 모서리에 기대어 거의 잠에 곯아떨어지기 직전인 호동을 제외하고는 회진중인 모든 의사들이 믿기지 않는다 는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한참 동안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던 지민이 아이의 부모를 쳐다보았다. 그들은 30 대 초반으로 보였고 길거리에서 장사를 하는 양 행색이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그들은 은인 과도 같은 지민에게 연달아 고개를 숙였다. 지민이 옆에 서 잇는 현수에게 눈짓을 했다. 그가 지민을 따라 복도로 나왔다. 지민이 정색을 하고 그를 바라보자 그가 침을 꿀꺽 삼켰다.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지민이 물었다. "의국비가 얼마나 남았죠?" 현수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회진 중에 느닷없이 의국비를 물어 오니 영문을 모를 수밖에 없었다. "의국비요?" 지민이 말했다. "원무과에 가서 저 아이 수술비랑 입원비를 좀 내 주세요. 보증은 내가 서기로 하고." 현수가 어이없다는 듯 지민을 쳐다보았다. 지민이 말했다. "다음달에 내 보너스가 나오면 그걸로 메꾸고." 현수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지민은 그의 어깨를 툭 쳐 주고는 다음 병실로 향했다. 그는 지민의 뒷모습을 보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병실에서 의사들이 우르르 빠져나왔다. 환자의 기적적인 상태에 대한 의견들을 주고받으 며 지민의 뒤를 따랐다. 그런데 그들 중에서 호동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현수가 그들을 보면서 물었다. "박호동은 어디 갔어?" 모두들 대답 대신 턱으로 병실 안을 가리켰다. 그가 병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호동은 침 대에 기대어 선 채 열심히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환자 보호자들이 그와 호동을 번갈아 보며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현수는 보는 사람들이 있어 화를 심하게 내지는 못하고 낮게 소리치며 그를 흔들어 깨웠 다. "야, 박호동, 뭐하는 거야?" 호동이 흘러내리는 침을 되삼키면서 눈을 번쩍 떴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현수의 뒤를 따랐다. 다음은 뇌수술을 한 지 일주일 되는 할아버지 환자였다. 지민이 다정하게 물었다. "할아버지, 어떠세요?" "음, 좋아." 지민은 환자들에게는 인기가 좋은 편이었다. 항상 다정하고 공손하게 그들을 대했기 때 문이었다. 할아버지는 수술 결과에 비해서는 상태가 그리 좋아진 것은 아니었다. 의사들은 환자에 대해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었다. 옆에 잇던 40대 중반의 남자 환자 보호자가 지민을 불렀다. "강 선생님, 강 선생님!" 지민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네, 왜 그러십니까?" "환자가 어제부터 머리가 아프다고 그러는데 좀 봐주시겠어요?" "네, 그러죠." 지민은 선선하게 대답하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혈압과 맥박을 재 보고 나서 그가 말했다. "상태는 좋은 편인데요. 수술 후에 올 수 잇는 현상이니 너무 걱정 마세요." 보호자가 인사를 꾸벅 했다. "네, 고맙습니다." 지민도 인사를 하고 다른 의사들과 함께 병실을 나갔다. 회진을 끝낸 지민은 비상구를 내려가 재활의학과 수중치료실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나이에 비해 머리가 좀 빨리 벗겨진 듯한 30대 중반의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의사들과는 좀 다르게 보이는 가운을 입고 있었다. 물리치료사였다. 지민은 옷을 벗고 수영장보다는 작고 목욕탕의 욕조보다는 큰 풀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물 속으로 들어가자 집으로 돌아온 사람처럼 편안한 얼굴이 되었다. 그는 마치 태아가 산모의 뱃속에 들어 잇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웅크리고 앉았다. 고개 를 무릎 사이에 넣고는 숨도 쉬지 않고 있으니 마치 그 모양대로 죽은 시체 같았다. 물리치료사는 출입문 밖에 서서 잔뜩 긴장해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누가 오기라도 할까봐였다. 그는 안으로 들어가 풀 주위를 왔다갔다 하다가 시간이 생각 이상으로 길어지 자 불 속을 살펴보았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이미 나왔을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나올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물리치료사는 기다리다 못해 물 속으로 손을 넣어 그의 어깨를 잡았다. 그 순간 그가 파 - 하고 호흡을 크게 내뿜으며 물 위로 솟구쳐 올랐다. 커다란 파문이 일었다. 물보라를 튀기며 지민이 나타났다. 움질 놀란 물리치료사가 아직 제정신이 돌아오지 않 은 듯한 그에게 수건을 내밀었다. 물리치료사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강선생... 15분이 다 됐는데예... ." 강지민은 부릅뜬 눈으로 물리치료사를 노려보았다. 물리치료사는 찔끔해서 얼른 그의 눈 길을 피했다. 그는 여느때와 전혀 달라보였다. 뭔가 다른 기운이 그를 송두리째 장악하고 있는 듯했다. 그의 온몸에서 강렬한 힘이 느껴졌고 눈에서는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지민은 곧 본래의 부드러운 모습으로 돌아왔다. 지민은 그제서야 수건을 받아서 몸을 닦고 빠른 동작으로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는 옆에 서 잇는 물리치료사에게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번번이 죄송합니다." 물리치료사는 그의 인사에 몸둘 바를 몰라했다. "우데예! 고마 샘 아니었으믄 우리집 꼬맹이는 벌써 딴세상 사람 됐을 낀데... . 거에 비 하믄 이 정도는 암것도 아니지예." 지민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 잘 있죠, 아드님?" 물리치료사는 두 손을 맞잡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모예, 잘 큽니더." 지민은 순박해 보이는 물리치료사를 웃음띤 얼굴로 한 번 쳐다보고는 치료실을 나갔다. 고속 엘리베이터가 다시 말쑥해진 지민을 태우고 윙- 하는 소리와 함께 위로 치솟아 올 랐다. 수십미터를 빠른 속도로 올라가던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그는 뚜벅뚜벅 걸어나갔다. 병원 복도는 여전히 분주했다. 의사들이 지나다니고 환자들 도 그에게 인사를 하며 지나갔다. 간호사들이 지민을 흘낏거렸다. 환자를 태운 스트레치카 가 수술실을 향해 달리고 있었고 울고 있는 보호자도 보였다. 복도의 정경들과 어우러져 지민의 눈앞에 자신의 어린 시절 모습이 어른거렸다. 아홉살 난 어린아이는 겁에 질려 있었고 방울소리는 요란했으며 신칼이 신나게 휘둘러지고 있었다. 진하게 화장한 무녀는 신명나게 춤을 추었다. 지민의 어머니였다. 지민을 보고 동네 아 이들이 수군거리며 돌멩이를 던지기 시작했다. 어린 지민은 산 쪽을 쳐다보았다. 지민은 산 속으로 뛰쳐 올라갔다. 풀숲을 헤치고 달렸다. 풀숲이 선명하게 보이고 그 안에는... 그 안에는... ! 지민은 그쯤해서 고개를 흔들었다. 신경외과의 한 수술실에서는 수술복을 입고 마스크와 캡을 쓴 채 눈만을 내놓은 4명의 의 사들과 두 사람의 간호사들이 수술준비에 한창이었다. 수술실의 중앙에는 묵직한 침대가 놓여 있었고 그 주위에는 환자의 상태를 체크하기 위한 각종 계기판과 전도계 등의 모니터와 함께 혈액 공급과 수술중의 혈액을 걷어 내기 위한 석 션 기계들로 포진되어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거창하게 보이는 건 환자의 머리맡에 마 치 거미처럼 팔을 뻗치고 있는 대형 현미경이었고 미세한 움직임까지도 페달을 밟아 조정하 는 묵직한 철제의자도 있었다. 마취과 의사인 표지수와 또 한 사람이 사타구니만 가리고 누워 있는 30대 후반의 여자 환 자의 몸 곳곳에 주사 바늘과 리드(몸에 부착하는 동그란 것)들을 부착시키고 있었다. 숙달 된 손놀림으로 일을 마친 지수가 계기판의 시그널에 이상이 없음을 체크하고 눈길을 돌리자 이 과장이 오라고 손짓했다. 그는 수술실과 유리벽으로 구분지워져 있는 방에서 마스크와 캡을 쓴 채 세면대에서 브러쉬로 손의 마디마디에 약품을 묻혀 가며 씻고 있었다. 그 동안 수술팀 의사들은 빡빡 깍은 머리에다 스크류못이 박힌 원형의 고정핀을 박았다.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핀이 박혔지만 잘못 박았는데 다시 빼 내자 구멍이 나고 그곳에서 피 가 흘렀다.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한 번 핀을 막아 스크류나사를 돌렸다. 빠지직거리는 소리가 났다. 지수가 이 과장 곁으로 다가가 섰다. 그녀는 시원스런 눈매에 야무진 입술을 하고 잇는, 똑똑하면서도 차가워 보이는 인상이었다. 그가 흘낏 돌아보며 물었다. "어머니, 잘 계시지?" "네... 근데 삼촌은 꼭 어려운 수술만 맡으세요?"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렵긴... 주로 지저분한 것만 맡는 거지." 그녀는 피식 웃었다. 이 과장이 그녀를 보며 물었다. "강지민 선생이 네 동기지?" 그녀는 갑작스런 질문에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네... ." 그는 손을 헹구어 냈다. "그 친구 학교 때는 좀 어땠니? 아주 똑똑해 보이던데." "삼촌이 미국에서 온 지 얼마 안돼서 몰라서 그렇지 원래 유명한 친구예요." "유명해?" "입학해서 한번도 일 등을 놓친 적이 없어요. 결국 KMA까지 수석을 해 놓고는 힘들고 돈 안되는 NS를 선택해서 다시 한 번 사람들이 놀라기도 했구요." 그는 타월로 손을 닦았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냐? 너도 공부 잘 했는데 돈 안되는 마취과에 남았잖니?" 그의 말에 지수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녀에게 그가 눈짓을 했고 함께 수술실 로 들어갔다. 그가 양팔을 벌리자 간호사가 수술복을 한 겹 더 입혀 주었다. 그러고 나서 계속 말하고 있는 그에게 장갑을 끼워 주었다. "너희 어머니가 보스턴으로 전화를 걸었던 거 아니? 네가 상의도 없이 마취과를 선택했 다고... . 넌 오히려 정신과가 더 어울렸을 텐데." 그녀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저 지금 만족해요... ." 그는 소독액이 묻은 솜을 받아 손을 닦아 냈다. "그게 이상하단 말이야. 왜 적성에도 맞지 않는 과를 선택해서 만족하고 지내는지가... " 지수는 뭔가 마음속을 들키기라도 한 듯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 과장은 수술대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간호사가 건네주는 메스를 받아 쥐었다. 그 는 메스를 쥔 채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 "강지민이라는 친구에 대해서 몇 가지 궁금한게 있는데 이따가 내 방으로 좀 오거라." 그녀는 안경을 치켜올리며 뭔가 대꾸를 하려고 그를 쳐다봤다. 그러나 그는 이미 수술하 는 데 몰입하고 있었다. 이 환자도 최소한 다섯 시간 이상은 수술을 해야 했다. 이 과장의 메스 아래에서 절개된 머리 속이 휜히 드러나고 이어서 긴장한 그가 날카로운 눈을 들어 현미경을 들여다봤다. 그가 핀셋으로 뇌의 구조물 속에서 조심스럽게 혈종을 찾 아 끄집어 내기 시작했다. 조금만 잘못 건드려도 환자가 즉사할 수 잇는 뇌 속을 헤집고 다니는 그의 이마에 채 20분도 되지 않아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이석명의 방은 한국 신경외과학의 거두답게 수많은 원서들이 온 벽을 뒤덮고 있었고 그 사이 사이에 각종 증명서와 감사패들이 걸려있었다. 특히 하버드 의대에서 수여한 학위 증 서가 들어있는 깔끔한 액자가 눈길을 끌었다. 책상 위에는 척추 뼈와 신경의 분포를 나타 낸 모형 해골이 놓여 있었다. 그는 수술을 마치고 난 뒤라서 피로한 눈을 비볐다. 온몸의 긴장이 풀려 노곤해진 상태 였다. 환자는 상태가 상당히 좋지 않았지만 수술은 잘된 편이었다. 그는 눈을 감고 의자에 기대어 목을 뒤로 젖혔다. 한참 동안 그러고 있던 그는 몸을 일 으켜 자세를 바로잡더니 NS(신경외과 최신 정보 및 연구 저널)를 집어들었다. 그걸 펼쳐 들고 읽으려는데 누군가가 노크를 했다. "들어와요." 지수였다. 이 과장은 눈을 들어 그녀임을 확인하자 잡지를 다시 밀어 두었다. 그녀는 그를 마주 보며 앉았다. "강 선생이 뭘 잘못했나요?" 그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게 아니고... ."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의자를 돌려 옆으로 비스듬히 앉았다. 그녀는 궁금한 눈길로 그 를 쳐다보았다. "... 벌써 세번째야." 그녀는 그의 앞뒤를 알 수 없는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 번째라뇨?" 그는 턱을 만지작거렸다.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거." 그녀는 기적이라는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도저히 살 수 없는 환자를, 그것도 자그마치 세 명이나, 강지민이라는 레지던트 4년차가 응급 수술을 해서 살아났단 말이야. 아마 내가 응급실에 있었더라면 수술조차 하지 않았을 거야... . 당연히 하지 않았어야 하니까... ." "... 기분이 상하셨어요?" 그는 의외의 말에 그녀를 보았다. "기분이 상하다니?" "글쎄요, 삼촌은 워낙 자존심이 강한 분이니까... 감히 삼촌이 손대 볼 엄두도 못 내는 환 자들을 강 선생이 살려 내서 혹... ." 그는 크게 웃어 젖혔다. "하하하! 지수야, 너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는 얼굴에서 웃음을 걷어 내며 정색을 했다. "이봐, 닥터 표!" 그녀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가 사뭇 소리를 높여 말했다. "내가 누구냐? 난 신경외과 의사야. 내가 하버드에서 학위를 받았거나 대한민국에서 최 고로 인정하는 신경외가 의사이거나 하는 문제는 내가 의사이고 난 다음의 일이야. 무슨 말인지 알아?" 그녀는 자기가 한 말에 대해 후회하는 표정을 지었다. "의사란 직업은 환자의 생명을 구하는 데 그 목적이 잇는 거고 그 목적은 무엇보다 선행 되어야 해! 권위나 자존심은 그 나중 문제야." 그녀는 눈을 내리깔았다. "죄송합니다." "괜찮아. 넌 어릴 때부터 날 봐 왔으니까 그런 오해도 가능할 거야. 아무튼 강 선생이 환자를 살려 낸 것은 무조건 잘한 거야. 아주 훌륭한 일을 한 거라고. 그런데 말이야... ." 그의 표정이 야릇하게 변했다. 뭔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어서였다. 그를 보고 있던 그녀도 표정도 따라서 변했다. "특이한 건 모두 만 4세 미만의 어린 환자들인데... 문제는 결과는 있는데 과정이 없다는 거야. 본인의 말대로라면 뇌 속에 고여있는 피를 제거해 주고 혈관을 클립으로 집어 준게 다라는 이야긴데... ." 그녀가 물었다. "그럼 그것 말고 또 있나요?"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 어린 환자들은 주로 뇌간 부위에 출혈이 심했단 말이야. 즉, 숨골 근처란 말인데 거 긴 살짝만 잘못 건드려도 환자는 바로 사망이야. 너무 위험해서 나도 잘 열지를 않아. 아 니, 어떤 신경외과 의사도 거길 여는 건 환자의 죽음을 앞당기고 의사로서의 캐리어에 먹칠 을 할 가능성이 거의 100%라고 생각하지." 닥터 표는 다소 긴장이 되었다. "... 혹시 운이 좋았던 게 아닐까요?" 그가 몸을 뒤로 젖혔다. "운이라... 그것도 가능하지. 그렇지만 그 운도 연두부 같은 뇌를 다루는 인간의 손놀림이 거의 빛의 속도처럼 빠르다면 가능한 이야기지." 그녀는 잔뜩 인상을 썼다. 이 과장은 다시 몸을 일으키며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내 계산으론 그 친구가 환자의 뇌를 오픈한 후에 막상 실제 수술을 할 수 있었던 시간은 채 5분도 안돼." 그가 말했다. "제일 빠르다는 내가 보통 5시간 걸려... ." 이 과장은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몰라 눈만 깜박거리고 있는 그녀의 날카로운 눈으로 빤 히 쳐다보았다. 그가 몸을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이제껏 그 친구에게서 이상한 걸 보거나 느낀 적 없니?"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글쎄요... . 항상 열심히 하고 환자의 생명에 대한 집착이 크다는 것밖에 몰라요." "내 생각엔 분명 뭔가가 있는데 말이야... ." 2 이 과장의 방을 나온 닥터 표는 아직 멍한 상태였다. 만일 이 과장의 말이 사실이라면 기적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만했다. 그녀는 강지민을 떠올렸다. 똑똑하고 잘생겼을 뿐만 아 니라 환자에 대한 애정도 누구 못지 않게 큰 의사였다. 그는 학창시절에도 공부를 잘해서 항상 일 등을 놓치지 않았고 병원 생활을 하면서도 여 유가 있을 때는 손에서 책을 놓는 법이 없었다. 그가 의사로서의 본분을 다해 환자를 살려 내서 좋은 일이긴 했지만 기존의 의사들이 이해할 수 없는 수술을 했다는 건 사실 복잡하고 근거 없는 소문이 나돌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녀는 내심 걱정이 되었다. 그녀는 생각에 잠겨 복도를 걸어가다가 들어가야 할 곳을 지나치고 말았다. 실습할 학생 들과 마취과 과장실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그곳을 지나친 것이었다. 그녀는 되돌아가 과장실의 문을 열었다. 과장은 없고 학생들만 떠들어 대고 있었다. 지수가 손뼉을 탁탁 치자 5명의 학생들이 그녀를 쳐다봤다. "자, 조용히 하세요. 과장님은 어디 가셨죠?" 학생들 중 한 명이 말했다. "네, 좀전에 마취할 환자가 있다고 나가셨습니다." 그녀는 문 쪽으로 가며 말했다. "모두들 나를 따라오세요." 학생들이 우르르 그녀를 따라나섰다. 학생들이 뒤에서 앞서가는 그녀를 보고 날씬하다느 니 각선미가 끝내준다느니 하며 속닥거렸다. 그녀는 개의치 않고 또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씩씩하게 걸어갔다. 수술실의 자동문이 열렸다. 지수가 학생들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학생들을 둘러보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항공기는 이착륙시의 몇 분 동안의 가장 위험하단 말 들은 적 있죠? 그때 바로 조종사의 판단력과 함께 고도로 숙련된 테크닉이 필요한 겁니다. 마취 과정도 마찬가지예요... ." 수술실에는 간호사 두 사람이 있었고 수술대 위에는 20대 중반의 젊은 남자가 잠에 든 채 누워 있었다. 그녀는 조용하고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즉, 인덕션 후 완전한 마취가 이루어지지 까지와 수술 후의 회복과정이 가장 주의를 요 합니다." 그녀는 복잡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잇는 기계를 옆으로 갔다. "수술중 페이션트의 상태는 주로 두 가지 모니터에 의해 체크됩니다. 심전도와 함께 SaO2인데, 산소 포화도의 경우 70이하로 내려가면 위험해요." 학생들은 그녀가 하는 말을 열심히 들으며 간간이 받아 적기도 했다. 그녀는 환자를 내려다보았다. "현재 이 환자에게는 정맥주사를 통해 수면제와 근이완제가 투약된 상태예요." 지수가 학생들 중의 한 사람을 쳐다보았다. "수면제는 뭘 쓰죠?" 학생이 대답을 하는 동안 그녀는 튜브를 박기 위한 준비를 했다. "만니톨이나 펜토를 씁니다." 그녀가 또 다른 학생을 가리켰다. "근이완제의 역할은?" "기관지 안으로 튜브 삽입을 하기 위한 것 아닙니까... ?" 그녀는 말끝을 흐리는 학생의 얼굴을 힐끗 보더니 말했다. "다시 텍스트를 보고 확실히 해 두세요. 튜브를 삽입할 테니 잘들 봐 둬요." 그녀의 숙달된 손이 튜브를 환자의 목구멍 깊숙히 넣는 것을 학생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레지던트 1년차가 튜브를 삽입하는 데 익숙해지려면 최소한 3개월이 걸리는데 손놀림이 좀 둔한 경우엔 6개월씩 걸리기도 해요." 그때 학생들 중의 한 사람이 자기 옆에 있는 뚱뚱한 학생을 툭치며 장난을 걸었다. 그러 자 뚱뚱한 학생이 발끈해서 상대방을 노려보았다. 그것을 본 지수가 장난친 학생에게 물었 다. "마취가스가 뭐지?" 그 학생은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네... 그게... 저... ." 그러자 뚱뚱한 학생이 잽싸게 대답했다. "N2O, O2와 함께 엔프란 또는 아이소푸루란입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장난친 학생이 찔끔해서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기계의 노브를 돌렸다. 그러자 쉬익, 쉬이익 하는 소리가 나며 가스가 관을 통해 환자의 입 속으로 들어갔 다. 그녀가 학생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자, 이제 환자는 마취된 상태예요." 학생들이 다가와 환자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지금 이 환자는 심장만 뛰고 있을 뿐 사망한 상태와 거의 다를게 없습니다. 만약 누군 가가 O2의 공급을 중단시키면 환자는 이 상태에서 안락사를 맞이하게 돼요. 마취의가 수술 실에서 철천지 원수를 만난다면 복수는 아주 간단하죠." 그녀는 말하는 도중에 기계의 노브를 다시 한번 쥐고 돌리는 시늉을 했다. 그것을 잠그 기만 하면 환자는 사망이라는 말이었다. 학생들이 침을 꼴깍 삼켰다. 지수는 눈을 빛내며 학생들의 표정을 살폈다. "여기까지... 질문은?" 학생들은 서로 눈치만 보았다. 그때 아까 장난을 쳤던 학생이 불쑥 한마디했다. "선배님은 정말 마취과를 잘 선택하신 것 같습니다." 그녀가 학생을 쳐다보았다. "왜?" "왠만한 남자 환자는 선배님을 소는 순간 그~냥 마취가 될 것 같습니다. 워낙 미인이시 라서... 헤헤." 그 학생이 말을 마치고 그녀를 곁눈질로 보며 씨익 웃자 다른 학생들도 실실 웃었다. 지수는 학생들을 째려보며 턱을 치켜들었다. "내일 아침까지 수술중에 발생할 수 잇는 응급 사항을 체크하고 마취과적인 처치 사항과 그 메커니즘에 관한 레포트를 제출하세요. 글씨 폰트 10, 줄 간격 160, 상하좌우 여백 2Cm 로 30장 이상만 받습니다. 내용 체크는 교수님 대신 제가 하니까 알아서 하세요." 학생들은 표정이 일그러졌다. "특히 NS OP중 뇌압 상승으로 심장이 멈추는 경우에 대해서는 간단한 시험을 볼 겁니 다." 학생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과제 사항을 적다가 시험 얘기에 눈을 커다랗게 뜨며 비명을 삼켰다. 지수는 모르는 척 냉정하게 말했다. "오늘은 이걸로 마칩니다. 돌아가세요." 모두들 기운이 빠진 사람들처럼 어깨를 늘어뜨리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수술실을 나가는데 뚱뚱이가 장난치던 뺀질이에게 너 때문이라는 듯이 주먹을 쥐어 보였다. 그들을 지켜보던 지수는 수술실의 간호사와 눈길을 마주치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러 고는 자기의 손목시계를 들여다봤다. 점심시간이 휠씬 지나 있었다. 분명 지민은 지금도 점심 먹을 생각도 않은채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수술이 잡힌 것은 없으니 응급 실에 있을 것이 뻔했다. 그녀는 일층에 있는 응급실로 내려갔다. 응급실은 언제나처럼 많은 환자와 의사들로 북적거렸다. 곧 숨이 넘어갈 것처럼 비명을 지르는 환자, 의식을 잃어버린 환자, 별로 증상이 심각하지 않은 환자, 그들 사이로 흰 가운 을 입은 의사와 간호사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지수는 두리번거리며 지민을 찾았다. 그는 목에 구멍을 내어 인공호흡기를 부착시켜 놓은 50대 환자의 눈꺼풀을 까올리고 소형 플래쉬로 비춰 보고 있었다. 환자의 초점을 잃은 힘없는 눈동자가 들어났다. 그는 나머지 한 쪽 눈까지 비추어보고 그의 옆에서 X-ray를 들고 기다리고 잇던 현수와 함께 형광판 쪽 으로 이동했다. 지수가 그제서야 그를 발견하고 그쪽으로 따라갔다. 이때 입구에서 비키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스트레치카가 빠른 속도로 들어왔다. 그 위에는 택시 기사 복장의 사람이 피를 흘리며 누워있었다. 의사들 몇몇이 그쪽으로 뛰 어갔고 지민도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뒤에 와 있던 지수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깜짝 놀라는 눈으로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그녀가 물었다. "밥 먹었어?" 그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녀가 다짜고짜 그의 소매를 붙들고 잡아끌었다. 그는 끌려가면서 현수에게 소리쳤다. "이봐, 나머지 일 좀 부탁할께!" 현수가 싱긋 웃으며 한 쪽 손을 들어 보였다. 지민이 사정하듯 지수에게 말했다. "지수야, 너 이러다가 옷 찢겠다. 이것 좀 놔. 따라갈 테니까 걱정말고." 그녀가 뒤를 돌아보며 소매를 놔 주었다. "말을 들어먹어야 강압적인 행동을 않지!" 그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그의 미소에 살짝 눈을 감으며 얼굴을 돌려 외면했다. 앞장 서서 또각또각 소리내며 걸어가는 그녀를 그는 미소를 지은 채 따라갔다. 그녀는 지민을 벤치에 앉혀 놓고는 혼자서 매점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뒤에서 소리쳤다. "표지수, 간단한 걸로 부탁한다." 잠시 후에 그녀가 나와 그에게 초코파이 몇 개를 던져 주고는 되돌아가서는 자판기 커피 를 두잔 뽑아왔다. 그녀는 그의 곁에 앉아 커피 한 잔을 건네 주었다. 그는 먼저 초코파이 의 껍질부터 벗겼다. 날이 저물어 갈 무렵이었지만 아직 따스한 햇살이 그들의 머리위로 쏟아졌다. 가을이라 바람이 조금은 스산하게 느껴지면서도 아직까지는 부드러웠다.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지 않고 정면을 향한 채 이야기했다. 지수가 물었다. "입원한 교수님들은 어떠셔?" "최 교수님은 위를 60% 정도 잘라냈고 정 교수님은 한달쯤 더 쉬셔야겠다던데."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너 일복 터졌구나." 지민은 대답 대신 씨익 웃었다. 지수도 초코파이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시험 준비는 잘돼 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두 사람은 커피를 한 모금씩 마시고서는 잠시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과장님이 날 만나 보래?" 그녀가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졌다는 듯이 헛웃음을 지었다. 지민이 발 끝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가 살린거 아냐... . 그냥 죽을 운명이 아니라서 환자가 스스로 버텨 낸 거지." 지수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도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는 저녁 햇살의 오렌지색 광선이 똑똑하고 차갑게만 보이던 지수의 얼굴 한 쪽을 불그스름하게 물들 이자 그나마 부드럽게 보였다. 그가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그녀가 그런 그를 보며 물었다. "왜?" "아냐... ." "뭐가?" "고마워." "뭘?" "우리 수술 스케줄 잘 잡아 줘서... ." 지수의 표정이 딱딱하게 변했다. "그건 원칙대로 잡는 거야. NS라고 특별히 챙기는 거 없어." 지민은 다 안다는 듯이 웃었다. "아무튼... ." 그녀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나더니 갑자기 물었다. "그 여자 퇴원했어?" 그는 누구를 말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얼굴을 했다. "국회의원 딸인가 있잖아... . 너랑 결혼한다고 퇴원 안하겠다고 생떼를 썼던 애... ." 그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퇴원했어." 그녀가 비꼬듯 말했다. "포기했대? 너 꼬시는 거... ?" 그는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커피를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가야겠다." 그녀가 일어선 그를 노려보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인간하고는... 그래, 가!" 지민은 커피잔과 빈 봉지를 쓰레기통에 넣고는 병원 출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그의 뒷모 습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지수의 눈에 약간의 원망과 함께 서운함이 서렸다. 그는 벌 써 사람들 사이에 묻혀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항상 저런 식이었지." 그녀는 고개를 돌려 지는 햇살을 바라보았다. 학생 시절 지수는 처음에는 지민을 공부는 잘해도 사람들과는 어울리지 않으려고 하는 괴 짜로 생각했다.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의과 대학의 과 친구들과 선배들에게 골학을 배운답시고 뼈다귀와 씨름을 하고 있었다. 곧 본과에 올라가면 닥쳐 올 시험 지옥에 대비한 것이었다. 선배 한 사람이 스컬(머리뼈)를 든 채 후배들에게 설명을 해 주고 있었다. 뼈의 각 부위를 지나는 신경과 혈관 근육의 부 착 상태와 상호 연관성에 대한 것이었다. 친구들은 열 명 남짓 모여 있었는데 모두들 찌는 듯한 더위 때문에 땀에 절어 있었다. 녹초가 된 그들은 목에 물수건을 두르고 있거나 런닝 차림이었다. 그 중에서 그래도 비교적 단정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사람은 표지수와 강지민이었다. 그 녀는 긴 단발머리에 멜빵 치마를 입은 발랄한 모습이었다. 선배에게 지명을 받은 지수가 앞으로 나가 해골을 받아 들었다. 그녀는 조리 있는 설명 을 시작했다. 막힘없는 말로 또박또박 하나 하나의 명칭과 부위들을 짚어 가며 설명을 했 다. 그녀의 눈에 구석에 앉아 물끄러미 그녀를 주시하며 귀를 기울이고 있는 지민이 띄었 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얼른 눈을 돌려 해골을 봤다. 표지수는 같은 과 친구들이 '표독수'라고 부를 만큼 지독하게 공부했지만 결국 그 별명은 '이등표'로 바뀌고 말았다. 일등은 항상 그의 차지였기 때문이다. 그녀가 설명을 끝마치고 들어가자 선배가 박수를 쳐 주었다. 완벽한 설명이었던 것이다. 친구들도 함께 박수를 쳤다. 본과에 올라간 이후 첫 시험 성적이 공개되었다. 가운을 입은 조교가 복도의 벽에 성적표를 붙였다. 생리학 점수였다. 학생들이 무리지어 그 앞으로 달려들었다. 지수는 그 틈을 뚫고 들어가 또 강지민 아래 2등으로 올라 있는 자 기 이름을 확인했다. 그녀의 얼굴에 실망하는 기색이 완연했다. 이제는 제일 위에 지민의 이름이 올라 있는게 당연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지민은 어디에 있나 둘러보니 그는 실험 가운을 어깨에 걸치고 계단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도서관으로 가서 오후에 있을 해부학 실습을 준비하기 위해 책을 펼쳤다. 책을 보면서도 은근히 화가 났다. 이번에도 밤을 새우면서 열심히 공부했는데 또 2등이라니! 게다가 본과에 올라온 이후로 처음 있는 시험이라서 새로운 마음으로 공부했던 것이다. 도 서관도 그보다 더 늦게 가는 일이 없도록 했고 제일 늦게까지 남아 있곤 했다. 아무래도 일등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 같았다. 아니, 그보다는 강지민을 앞서는 게 영원히 불가능할 거라는 표현이 어울릴 것이다. 그녀는 책을 덮어 버렸다. 그리고 바람이라도 쐴 겸 밖으로 나갔다. 등나무로 둘러싸인 도서관 건물 앞 벤치에 가서 앉았다.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잇는 그녀에게 누군가가 다가 왔다. "무슨 생각을 하니?" 지민이었다. 그녀는 새삼스럽게 그의 목소리가 부드러운 것에 놀랐다. 그녀가 하고 싶은 일등을 절대 놓치지 않고 붙들고 있으려는 사람이니 심술궃고 야비할 거라는 생각이 무의식 중에 생겼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괜히 얼굴일 빨개졌다. "아무것도 아냐." 그가 말했다. "커피 한잔 할래?" 지수는 뜻밖의 말에 놀라며 그를 쳐다보았다. 이제껏 그가 누구한테든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을 처음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지수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자판기로 가서 커피를 뽑 아다 주었다. 그가 돌아와서 커피 한 잔을 지수에게 건네 주면서 말했다. "처음엔 자판기 커피 맛이 너무 진하다 싶었는데 지금은 마실 만해. 멀리 가지 않아도 항상 가까운 곳에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들고... ." 지수는 뭐라고 말을 해 주어야 할지 몰라 그냥 커피만 마셨다.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다 가 고개를 돌려 지민을 쳐다보니 그는 옆에 사람이 있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는 듯 앞만 바 라보고 있었다. 지수는 처음으로 지민의 얼굴을 가까이서 자세히 보았다. 옆얼굴의 선은 부드러우면서도 아름다운 곡선을 이루고 있었다. 코가 조금 높은 듯 싶었지만 모양은 좋았다. 눈썹은 진했 고 턱은 남자답게 강해 보였다. 그 정도면 꽤 수려한 생김새라고 할 수 있었다. 지민은 자신의 얼굴을 훔치듯 자세히 들여다보고 잇는 지수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정말 도둑질이라도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흠칫 놀랐다. 지민이 살풋 웃으며 말했다. "곧 해부 실습이 있을 시간인데 우리 그만 들어갈까?" 지수는 무슨 말인지 모르는 사람처럼 멍해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는 지민의 뒤를 따라가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런, 넋을 잃고 쳐다보는 걸 들키다니... . 내가 왜 그랬지? 이 바보!' 지수는 자기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러나 그 순간 뒤돌아보는 지민에게 그 모습까지 들키 고 말았다. 그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지수 너 왜 그러니? 어디 아픈거 아냐?" 지수는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별걸 다 물어보고 그래." 그녀는 쿵쾅거리며 그를 지나쳐 앞서 가 버렸다. 뒤에 남은 지민은 영문을 몰라 그녀의 뒷모습만 보고 있다가 곧 빙그레 웃었다. 해부학 실습실에서는 스테인레스 침대 모양의 실습대 위에 시체 한 구씩이 놓여 있었다. 각 실습대 주위로는 7~8명의 학생들이 둘러서 있었다. 그들은 실습에 들어가기 전에 우선 묵념부터 했다. 교수가 묵념을 마치고 고개를 들자 학생들도 하나 둘 고개를 들었따. 교수 가 '1번:Shaving(면도)' 라고 쓰고 돌아서서 요령을 설명했다. 학생들은 조심스럽게 메스를 쥐고서 카데바(실습용 시신)의 몸에 난 머리털이며 체모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지수는 지민과 한 조였따. 그녀는 지민과 눈이 마주치자 얼른 외면하 며 고개를 숙여 버렸다. 그들이 맡은 카데바는 힘든 일을 하며 살았던 할아버지로 보였다. 그것은 오랫동안 포르 말린 용액에 담겨 잇었던 탓에 사람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절어 있었다. 지민은 조심 스럽게 팔뚝에 면도를 시작했다. 지수는 머리털을 깎았다. 지민은 팔의 상박에 이어 팔꿈치 아래로 조심스럽게 면도날을 옮겨 갔다. 면도날이 카데 바의 손가락 부위로 이동하는 순간 그의 손이 멈추었다. 카데바의 엄지손가락 끝에 감겨 있는 일회용 반창고가 눈에 띈 것이었다. 그가 손동작을 멈춘 것을 알고 지수가 그를 쳐다 봤다. 그의 표정은 너무나 진지해 보였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동작을 멈추고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그는 끼고 있던 비닐 장갑을 조용히 벗었다. 묵묵히 반창고가 붙은 카데바의 손을 자신 의 두 손으로 감싸 쥐어 주었다. 그리고 마치 살아 잇는 사람의 상처를 보려는 듯 천천히, 조심스럽게 반창고를 벗겼다. 지수는 그가 싸늘하게 식어 있는 카데바의 손을 잡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를 생각했다. 마음속으로 죽은 이의 명복을 빌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경건한 자세를 보고 나니 그동안 한낱 학생 수준의 의학 지식만으로 경쟁을 일삼으려 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그녀는 그날 어떻게 실습을 끝냈는지 몰랐다. 별다른 실수는 하지 않았으니 무난히 끝난 것 같았다.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차분하게 실습을 끝내고 다른 학생들에 섞여서 밖으로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면서 지민을 보는 자신의 눈이 달라져 있음을 느꼈 다. 그녀는 가방을 챙겨 집으로 돌아갔다. 실습이 꽤 오래 걸려 벌써 늦은 밤이 다 되어 있 었다. 어머니가 그녀를 극성스럽게 맞아 들였다. 하기야 평소에도 지수를 극진히 생각해 주는 어머니였다. 딸의 일이라면 웬만한 일은 다 알려고 들었고 사소한 것까지도 챙겨 주었다. 하나밖에 없는 딸이 의대에 들어간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몰랐다. 그녀는 동생인 이석명에게 자주 전화를 걸어 지수의 진로나 효과적인 공부 방법에 대해 묻곤 했다. 지수가 삼촌과 한 병원에서 근무한다는 게 그녀로서는 보통 안심이 되는 게 아 니었다. 그가 삼촌이니 아무래도 잘 돌봐 줄 것이고 또 누구보다도 지수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동생을 고등학생 때부터 데리고 있었던 것을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동생은 총 명하고 욕심이 많아서 공부를 의욕적으로 열심히 했다. 전교 일등을 꾸준히 지켰다. 지수 도 어려서부터 영이라고 재치가 있었지만 그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 분명했다. 남편도 아들이 없어서 그런지 동생을 예뻐하고 잘 대해 주었다. 무엇보다도 장래가 촉망되는 아니 라 뒤를 밀어 주고 싶은 생각도 강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녀는 오늘 지수가 학교에서 해부 실습을 처음으로 한 것까지 알고 있었다. "어서 오렴. 오늘 실습할 때 잘했니? 징그럽지는 않았어? 심장 약한 애들은 기절도 하 고 그런다던데." 지수는 어머니가 고맙기도 했지만 지나친 간섭 때문에 가끔 짜증이 나는걸 어쩔 수 없었 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괜찮았어요. 저 올라가서 좀 쉴게요." 어머니가 그녀를 붙들었다. "저녁은 먹었니? 뭣 좀 먹고 올라가야지." "됐어요.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요." "네가 좋아하는 잡채 만들어 놨는데. 아주 맛있게 됐어." "됐다니까요." 어머니는 지수의 서슬에 놀라 뒤로 물러서며 입을 다물었다. 지수는 위층으로 올라가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서자 마자 바로 침대에 뛰어들 었다. 팔베개를 하고 누워 생각에 잠겼다. 사실 그날은 사람을 해부하고 난 충격을 어느 정도 받기는 했다. 정말 아무것도 목구멍으로 넘길 수 없을 것 같았다. 지민의 얼굴이 떠올랐 다. 가끔 그의 얼굴이 떠오를 때면 이 자식 때문에 내가 이 등 인생을 산다는 생각에 속이 상했는데 이상하게도 그런 마음이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그가 일 등을 하는 게 당연하게 생각되었다.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사랑이 자신보다도 앞서 있지 않은가! 그녀는 그대로 잠이 들어 새벽 동틀 무렵에야 일어났다. 밖으로 나가 정원을 거닐었다. 새벽의 신선한 공기가 기분좋았다. 나무와 꽃들이 보기 좋게 심어진 정원은 잘 가꾸어져 있었다. 나무는 정성스럽게 모양을 내서 다듬어져 있었고 꽃도 관리를 잘해서 깨끗하고 예쁘게 피어 있었다. 그녀는 넓은 정원을 한바퀴 돌고는 방 으로 들어가 학교 갈 준비를 했다. 그녀가 새벽이면 일찍 학교를 가기 때문에 그녀의 어머니도 일찍 일어나 아침 식사를 준 비했다. 그러나 그녀는 아침까지도 여전히 입맛이 돌아오지 않았다. 카데바의 내장과 머리 속이 그대로 눈앞에 떠올랐다. 어머니가 좀더 먹으라고 붙잡는 것을 뿌리치고 차가운 이른 아침의 공기를 마시며 학교 도서관으로 갔다. 거기에는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지민이 벌써 와서 책을 펼쳐 놓고 공부 에 여념이 없었다. 그녀는 그와 좀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엎드려 잠을 자고 있었다. 시험 기간이 아직 아닌데다가 자리를 잡을려고 일찍 온 것이라서 대개 는 부족한 잠을 채우기 일쑤였다. 지수는 책을 꺼냈다. 글자가 눈에 잘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억지로 읽어내려 갔다. 한참 을 그러고 있으려니 아침햇살이 밝게 비쳐 들어왔고 배가 고파졌다. 고개를 들어 지민이 있는 쪽을 바라보니 그는 아까의 그 자세로 꼼짝도 않은 채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하여튼 독종이라니깐.' 그녀는 고개를 돌려 다시 책을 보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그에게 다가갔다. "이봐, 책벌레! 배고프지 않아?" 지민이 힐끗 지수를 쳐다보더니 다시 책으로 눈길을 돌리며 말했다. "응, 괜찮아." 지수의 성질대로라면 지민이 앉아 있는 의자를 발로 냅다 차 버리고 싶었지만 꾹 눌러 참 았다. '뭐 이런 자식이 다 있어?' 지수는 화를 참으며 다시 한 번 말했다. "그럼 나하고 식당 좀 같이 가 줄래? 혼자 먹기가 좀 그래서 그러니까 같이 가자." 그가 고개를 들어 사방을 훑어보았다. 아마도 다른 친구가 있으면 그 사람과 가라고 할 속셈인 것 같았다. 지수는 그의 팔을 붙들고는 잡아 당겼다. "식당 한 번 가기가 그렇게 어렵니?" 지민이 깜짝 놀라는 듯 하더니 씨익 웃으며 일어나 그녀를 따라 갔다. 그는 백반을 가져 와서는 맛잇게 먹는 그녀를 지켜보며 미소를 떠올렸다. "근데 너 아침은 정말 먹었니?" 지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뭘 먹었는데?" "초코파이하고 커피." 그녀가 눈을 커다랗게 뜨며 물었다. "그거 가지고 요기가 돼?" "그럼, 그걸 하나 먹고나면 얼마나 든든한데." "... ." 그녀는 말없이 웃고 있는 그를 보더니 먹고 있던 백반이 담긴 쟁반을 내밀었다. "이것 좀 먹어 봐." 그가 고개를 저으며 쟁반을 다시 그녀 쪽으로 밀었다. "그럼 내가 이따가 점심을 사 줘도 되겠니?" 지민이 막 입을 열려고 하자 지수가 가로채서 말했다. "안 돼겠다는 말은 하지마." 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승낙했다. "그래, 좋아. 그런데 점심보다는 저녁에 좋겠어. 수업이 점심 먹을 시간도 없이 스트레이 트로 있거든." 지수는 수업을 마치고 도서관에서 그를 기다렸다. 약속 시간인 일곱 시가 된 지 5분이 지나서야 그가 나타났다. "자, 나가자." 지수는 그의 자리에 그대로 놓여져 있는 가방을 가리켰다. "네 짐은 안 챙기니?" "학교 식당 갈거 아냐?" "내가 언제 그랬어? 빨리 챙겨. 학교 밖으로 갈 거니까." 지민이 머뭇거리며 그대로 서 있자 그녀가 가서 가방을 들고 왔다. 그리고 가방을 그에 게 떠안겨 주고는 앞서서 걸어갔다. 그가 뒤에서 어슬렁거리며 따라왔다. 지수는 그를 숯불갈비 집으로 데려가 갈비를 시켰다. 갈비가 먹음직스럽게 구워지자 그 는 게걸스럽게 먹기 시작했다. 지수가 깜짝 놀라 물었다. "너, 잘 먹는구나. 아무것도 안 먹는 앤 줄 알았는데." 그가 고개를 들고 잠시 멋쩍어하더니 다시 갈비를 뜯기 시작했다. "지수 너도 좀 먹어." 식사를 끝내고 밖으로 나오자 지민이 말했다. "네 덕분에 오늘 저녁은 정말 포식했다. 그럼 난 이만 가볼께." 그녀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머, 너... 너 그냥 갈꺼야?" 그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왜, 무슨 일 있니?" "어머, 어머 얘 좀 봐, 차 한잔도 안 사주고 그냥 가겠다는 거니?" "아하, 그런 말이었어? 그런데 이걸 어떡하니, 급히 가 봐야 할 곳이 있는데. 커피는 나 중에 살게." 그는 지수에게 손을 한 번 들어 보이고는 그대로 돌아서서 가 버렸다. 지수는 기가 막혀서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그렇지만 그는 이미 눈앞에서 사라지고 없 었다. 사실 그가 모임이니 야유회, 축제 같은데 나타난걸 본 적이 없었으니 오늘 그녀의 초 대에 응한 것은 대단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녀는 그쯤에서 만족하기로 하고 터벅터 벅 집으로 향했다. 그날 이후 지민은 그녀를 보는 눈은 따뜻했지만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는 것 같 았다. 그러나 지수는 한시도 지민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에 대한 감정이 주체할 수 없는 열정으로 그녀를 괴롭힌 건 아니었지만 그가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확 실했다. 지수는 자신의 마음이 남들에게 드러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그와 같은 캠 퍼스에서 지내고 같은 도서관에서 공부하며 가끔은 같은 강의실에서 실습이나 시험을 보는 걸로 만족했다. 그렇게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왔다. 그날은 무척이나 추웠다. 지수는 도서관에 앉아 시험 준비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여 기저기 의과대학생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시험 때문에 평소보다 많은 수가 도서관을 찾았다. 밤이 깊어 가자 절반 이상이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그때 같은 과 학생 한 사람이 지수에게 책을 들고 다가와 문제를 하나 물어 보았다. 공부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던 그녀 는 다소 무성의하게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자기 공부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 에 귀찮을 수밖에 없었다. 그 학생은 두리번거리다가 지민에게 갔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보니 그가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고 있었다. 지수는 그를 한참 바라보고 있다가 갑자기 쏟아지는 졸음에 입을 막고 하품을 했다. 그는 누군가가 뭘 물어 오면 자기가 아무리 급한 일이 있더라도 그 친구가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정말이지 그렇게 설명을 잘해 줄 수가 없었다. 의과 대학생 치고 그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의 그런 점 때문에 싫어하는 사람도 없었다. 지수는 문득 잠이 들었다가 깨어났다. 일어나 보니 자기의 어깨에 외투가 덮여 있었다. 누구 것인 줄 몰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들 집으로 돌아갔는지 도서관 안은 텅 비어 있 었다. 다만 한 쪽 구석에서 지민이 책상 위의 조그만 노트에 볼펜을 댄 채 창 밖을 물끄러 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설마 하는 표정이 되어 그와 외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한참 후에야 지민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어, 깨어났구나." 그녀는 얼른 외투를 끌어내려 그에게 내 주었다. "이 외투 네 거니?" "응. 날이 추운데 너 감기 걸릴까봐." 지수는 괜히 허둥거리며 일어나 가방을 챙겼다. "나, 너무 늦었다. 빨리 가 봐야겠어." 어느새 지민이 그녀 곁에 와 섰다. "너무 늦었는데 내가 바래다줄께." 그녀는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아무 말 없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도서관을 나섰다. 바람이 차가웠다. 그녀는 몸을 움츠렸다. 그가 외투를 다시 벗어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 었다. 그녀는 거절하지 않고 그대로 걸어갔다. 조금 걸어 올라가다가 그가 택시를 잡았다. 두 사람은 택시 안에서도 별말을 하지 않았다. 지수는 그렇게 말없이 지민과 함께 앉아 있는 것이 더 마음이 편하고 따뜻했다. 그들은 택시에서 내려 골목을 걸어갔다. 집 앞에 이르자 지수가 그에게 외투를 돌려주었 다. "고마워, 이거." 지민은 그녀에게서 외투를 받아들고는 잠시 말없이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더니 돌아 서며 말했다. "잘 자. 나 갈게." 지수는 그 말만 남기고 벌써 저만치 걸어가는 지민을 보고 있자니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다음날도 일찍 일어나 도서관에 가서 지민의 옆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지민이 좀 당황하는 듯싶더니 싱긋 웃으며 반겼다. "잠은 잘 잤니?" "응, 너도?" 지민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지수는 책을 펼치고 앉아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책에 푹 빠져서 고개 한번 들지 않았 다. 강의 시간이 될 때까지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고 지수는 지루해서 한숨을 내리 쉬었다. 그날 강의가 끝나자 그녀는 그에게 어제 약속한 커피를 사 내라고 졸랐다. 그가 별로 내 켜하지 않자 그녀가 말했다. "시험도 멀었는데 뭘 그러니?" "내일 강의 내용 좀 미리 공부하려고 그래." "나가자, 응? 공부도 바람을 쐬어 가며 해야지." 그가 할 수 없이 책을 챙겨서 가방에 넣었다. 그는 학교 밖으로 나가자 그녀에게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가까운 커피숍으로 갈까?" 지수가 고개를 흔들었다. 지민이 물었다. "그럼?" 그녀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우리 한강으로 가자." 그가 머뭇거리다가 마음을 정한 듯 그녀의 가방을 빼앗아 들어주며 웃었다. "그러지 뭐." 한강에 도착했을 때쯤에는 석양이 지고 있었다. 강변에는 자가용이 가득했고 데이트를 하는 남녀도 많았다. 선상의 레스토랑이나 켜피숍은 휘황한 불빛으로 화려하게 장식이 되어 있었다. 지민이 그 중의 한 곳으로 지수를 데려갔다. 안으로 들어가서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지민이 물었다. "어때? 이 정도면 어제 저녁에 대한 보답이 될까?" 그녀가 활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여기서 커피 마시고 저녁은 너네 집에 가서 먹으면 어떨까?" 지민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집에 가 봤자 저녁을 지어 줄 사람도 없는데?" "나도 네가 자취를 한다는 것쯤은 알아. 가서 라면 끓여 먹지 뭐." 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여학생을 집에 데려가 본 적은 없어서... ."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한강에 깔리는 노을을 바라보며 교수들과 의학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지수가 말했다. "공부 벌레와 있으려니까 공부에 관한 이야기만 하는구나. 앞으로 진로는 어떻게 정했 니?" "아직 특별히 정한 건 없어. 다만 신경외과에 내 나름대로 관심을 가지고 있어." 그녀가 눈을 반짝였다. "신경외과?" "음, 그냥 그쪽을 좀더 공부해 보고 싶지만 그보다는 우선 KMA에 응시할 생각이야." 그들은 한강변을 거닐었다. 그녀가 말했다. "배 고프지 않아?" 그가 피식 웃었다. "그럼 이번에는 우리집으로 모셔야겠네?" 그는 그녀를 데리고 집으로 행했다. 버스에서 내려 골목길로 접어들자 그녀가 슈퍼마켓 으로 들어가서 라면과 음료수를 사들고 나왔다. 그의 방으로 들어선 그녀가 말했다. "남자들 방은 원래 좀 지저분해야 하는 거 아니니?" "네 눈에는 지저분해 보이지 않니?" 지수가 방을 둘러보는 사이 그는 부엌으로 나가 물을 올려놓았다. 그의 방에 가구라고는 책상 하나, 책꽃이 하나, 작은 옷장 하나가 전부였다. 책은 책꽂이 하나로는 모자라서 방은 한 구석에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그녀는 책을 훑어보다가 책꽂이 한쪽에 여러 권이 꽂혀 있는 무술에 관한 책을 보고는 고 개를 갸우뚱했다. "얘도 참 별군데에 관심을 가지고 있네." 문이 열리고 지민이 라면을 작은 상에 놓아 가지고 들어왔다. 지수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야, 맛있겠다!" "반찬은 김치뿐인데... 괜찮겠어?" "응 그거면 됐지 뭐. 그런데 이 김치 너희 엄마가 담근 거니?" "아니, 내가 담갔어. 의사를 선택하지 않았으면 난 아마 요리사를 했을 거야." "야, 너 재주 많구나." "농담이야. 어쩔 수 없어서 포장해서 파는 김치 사다 놓은 거야. 내가 김치 담글 시간이 잇겠니?" "라면을 맛있게 끓인 걸로 봐서 요리사 해도 되겠는데?" "하하하, 그래? 고맙다." 그녀는 그와 라면으로 저녁을 때우고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에게 밑반찬과 김치를 좀 싸 달라고 했다. 어머니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갑자기 웬 반찬을 싸 달라는 거니?" 지수가 말했다 "응, 자취하는 친구가 있는데 반찬이 다 떨어졌대요. 좀 많이 싸주세요." "친한 친구니?" "예." 그녀는 그가 없을 시간을 틈타서 어머니가 챙겨 놓은 반찬을 그의 집 부엌에 갖다 놓았 다. 그녀는 그를 위해서 갖다 놓은 것이지만 그는 별로 탐탁지 않아 했다. "지수야, 너 그런 거 갖다 놓을 필요 없어." "왜? 그런 것 좀 나눠 먹으면 안 되니?" "그냥 내가 부담이 되어서 그래." "친구 사인데 어때?" "그러지 마." 지수는 금세 시무룩해졌다. 그녀가 조금 가까이 다가가기만 하면 그는 한 발짝 물러섰다. 그는 항상 그런 식이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의 따듯한 눈빛이 좋았다. 언제까지나 그와 가까운 곳에서 숨쉬고 싶었다. 그도 그녀를 싫어하지는 않으니 언젠가는 그녀에게 마음을 열어 줄 것 같았다. 어쩌면 그녀와 비슷한 감정을 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항상 현명한 판단을 하는 지수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 다. 매점 앞 벤치에 앉아 있던 지수는 현재 지민과 같은 병원에서 그를 도우며 근무하고 있는 자신을 생각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여전히 그녀는 그를 지켜보고만 있을 뿐 학창시절보다 관계가 나아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때보다 더 만나거나 이야기할 시간이 없었다. 그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온 정신을 집중하는 것을 숨을 죽이며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정신을 가다듬고 수술실로 향했다. 그 시간 이후부터는 수술이 연이어 네 번이나 있기 때문에 늦은 밤까지는 꼼짝없이 수술실에 묶여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간암에 걸린 남자 환자, 제왕절개 수술을 할 여자 환자, 녹내장 수술을 할 할머니, 마지막 으로 뇌수술을 할 어린 여자 환자였다. 그녀는 수술실을 왔다갔다 하며 마취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실 마취의들은 마취만 하고 나면 일이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수술 시간 내내 자신이 마취한 환자의 상태를 체크해야 하고 환자가 제 시간에 제대로 깨어나는지를 지켜보 는 것도 중요했다. 일이 어느 정도 끝나니 밤이 꽤 깊어 있었다. 그녀는 병원의 텅빈 로비로 나가 의자에 앉았다.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그때 허리춤에서 호출기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댔다. 로비에 벽에 걸린 커다란 시계를 보니 밤 10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로비의 커다란 홀을 가로질러 안내 데스크의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번 호를 누르자 곧 신호가 떨어졌다. "마취과 표지수입니다." 지민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어디니?" "로비." "응급인데 도와 줘!"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상태는?" "후송중인데 딥 드로우지야. 스투파로 떨어지려고 해!" "알았어. 3번방 준비할게." 그녀는 전화를 끊고 빠른 걸음으로 비상구 계단 쪽으로 향했다. 현수에게도 호출이 떨어졌다. 그는 호동을 찾았지만 어느 곳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원래 잠이 많은 녀석이라 잠을 자고 있을 만 한 곳을 다 찾아 봤지만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생각다 못해 화장실로 가 보았다. 화장실 문을 하나씩 전부 열어 보았다. 끝에서 두 번째 의 문을 열어 젖히자 호동이 좌변기에 앉아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현수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시간을 다투어 처리해야 할 일이 쌓였는데 어떻 게 저렇게 한심하게 잠이나 자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그것도 사람의 생 명을 좌우하는 일을 해야 할 사람이... . 그는 중얼거렸다. "이럴 줄 알았어." 그리고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 "나와, 박호동! 당장 나오지 못해!" 호동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일어났지만 잠이 덜 깨 좌변기 밑으로 굴러 떨어질 뻔했다. 현수는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 혀를 찼다. 호동은 충혈된 눈을 껌벅였다. 호동은 현수를 따라 다급하게 비상구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계단에는 길다란 철봉이 층 과 층 사이의 공간을 관통하듯 이어지고 있었다. 현수가 가다 말고 뒤를 돌아보자 호동이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있었다. 아직도 잠에서 덜 깨어난 것이었다. 현수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외쳤다. "이따가 당직실로 와!" 호동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또 구타를 당하거나 기합을 받을 게 뻔했다. 그에게 당직실은 공포의 장소였다. 그들이 응급실의 주차장으로 가 보니 강지민, 인턴, 간호사는 이미 와 있었다. 현수는 지 민에게 고개를 숙여 늦어서 미안하다는 표시를 하고는 호동의 가슴을 팔꿈치로 쳤다. 호동 은 비명을 삼키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응급차가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내며 도착했다.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은 환자를 신속하 게 스트레치카로 옮겼다. 그리고 응급실로 밀고 들어갔다. 현수는 쉴 새 없이 압부백을 눌 러 댔다. 환자는 6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노인으로 입에서는 거품이 일고 눈은 뒤집어진 채 옆으로 축 처져 있었다. 호동이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환자의 상태가 너무 심각해서인지 그의 목소리에는 이 미 잠이 달아나 있었다. "MRI 찍을까요?" 지민은 플래쉬로 환자의 동공부터 확인했다. "그건 시간이 오래 걸려! 일단 CT부터 찍어! 뭐해? 빨리 라인 잡아!" 간호사가 환자의 혈관을 찾아 주사 바늘을 꽂느라 허둥거렸다. 지민과 현수는 환자의 옷 을 벗겼다. 그 옆에서는 40대 중반쯤의 여자가 거의 곡을 하다시피 울부짖고 있었다. 그녀는 진한 화장을 한 얼굴이었는데 통곡소리만 클 뿐 눈물은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다. 지민은 자신도 모르게 환자와 여자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환자와 부부라면 나이 차가 너무 많이 난다 싶었다. 간호사는 팔목에 주사바늘을 꽂은 후 거기에다가 반창고를 붙였다. 지민이 호동에게 소리쳤다. "츨루이드 주입하게 쇄골하정맥에서 큰 라인 하나 확보해!" 호동은 얼떨떨한 얼굴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네? 네... ." 호동은 간호사에게서 길고 굵은 주사바늘을 건네 받았지만 빼서 치켜들고만 있을 뿐 막상 어디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헤매고 있었다. 이를 본 지민이 그를 밀쳐 버리며 주사바늘 을 빼앗아 들었다. 그러자 호동은 그대로 벽에 쿵하고 머리를 부딪치고 말았다. 지민은 그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가락으로 환자의 우측 빗장 뼈 아래를 몇 번 눌러 보 더니 빼앗은 커다란 주사바늘을 사정없이 쑤셔 넣었다. 피가 금방 역류되어 나왔다. 그는 그 끝을 클립으로 묶어 주었다. 다음은 CT 촬영을 해야 했다. 의료진들은 환자를 데리고 촬영실로 갔다. 현수와 호동이 환자를 촬영 베드에 옮겨 눕혔다. 그동안에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은 CT실 기사가 빠른 손놀림으로 환자의 데이터와 촬영 부위에 대한 정보를 입력했다. 그리고 환자의 머리를 동그랗게 생긴 원통 모양의 기계 안 으로 들여 넣고 나서 버튼을 눌렀다. 위잉 하는 소리와 함께 촬영이 시작되자 기사가 옆에 있는 모니터로 옮겨앉아 이미지를 필름으로 전환시켰다. 현상실에 있던 지민이 필름이 올라오자 잽싸게 뽑아서 출구를 향해 뛰어나갔다. 그가 나가면서 소리쳤다. "3번 방으로 옮겨!"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스트레치카로 옮겨진 환자는 자동문을 지나 수술실로 들어갔 다. 호동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수술복으로 갈아입기 위하여 갱의실로 뛰어들어갔다. 혼 자서 남아 우두커니 환자를 지키고 있던 호동이 비장한 얼굴로 호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면 도칼을 빼 들었다. 그는 잠시 환자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에 살벌한 기운이 서렸다. 그는 환자의 턱을 한 손으로 제꼈다. 환자의 가느다란 목이 드러났다. 이윽고 호동은 면도칼을 목을 지나 이 마로 가져가더니 숙달된 손놀림으로 머리를 밀기 시작했다. 지수와 그녀의 바로 아래 연차의 마취의가 빠른 손놀림으로 머리가 빡빡 깎인 환자의 입 을 벌리고 개스관을 주입한 후, 손목과 발목, 그리고 가슴 부위에 리드를 부착했다. 이때 갑자기 삐- 소리가 나며 심전도계의 시그널이 플랫으로 변했다. 지수가 급하지만 나지막한 목소리로 지민을 행해 말했다. "플랫이야!" 그러자 형광판에서 사진을 보며 현수와 이야기하고 있던 그가 잽싸게 환자에게로 뛰어 들 어 가슴 부위를 주먹으로 힘껏 내리쳤다. 다시금 환자의 심장이 뛰기 시작하고 뚜-뚜- 하 는 시그널로 변했다. 지민이 호동에게 명령했다. "혹시 모르니까 흉부외과 지원팀에게 콜 때려!" "예!" 호동은 대답을 하면서 동시에 전화기 쪽으로 달려가 버튼을 눌렀다. 현수는 환자의 머리에 핀 프레임을 들이대며 말했다. "핀 박습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에 못이 박혔다. 환자의 머리는 시약 으로 뒤덮이고 노란색의 투명한 셀롤로이드가 발라졌다. 수술실 간호사는 수술대 위에 장 착된 선반 위에 하얀색 천을 덮고 각종 미세한 수술 도구들을 올려놓았다. 한편 흉부외과 당직실에서 가운을 입은 채 곤히 자고 있던 레지던트 한 명이 요란하게 벨 이 울리는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호동의 다급한 목소리에 그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나 머지 레지던트 두 사람을 깨웠다. 세 사람은 문을 박차고 나갔다. 수술실에서는 지민이 손에 메스를 쥐고 두 개골의 표피를 갈랐다. 피가 흘러내렸다. 현 수가 재빠르게 피를 제거하고 집게가위로 표피층을 벌려 주었다. 허연 해골뼈가 드러났다. 지민은 톱날이 달린 도구를 쥐고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휘잉~ 하며 톱날의 끝이 돌아갔 다. 톱날 끝이 크르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뼈를 파고들었다. 호동은 냄새가 역겨운 지 미간을 찌푸렸다. 흉부외과 지원팀은 전속력을 다해서 비상구 계단을 내려가 수술실 쪽으로 달려갔다. 그 들은 뛰어가는 도중에 가운을 벗어서 손에 들었다. 그들은 갱의실로 들어가 빠른 동작으로 수술복을 집어들었다. 숙달된 몸놀림으로 속옷을 훌렁훌렁 벗어 던지고 수술복을 걸쳤다. 수술실 안에서는 환자의 BP를 측정하는 그래프가 불규칙하게 변하더니 차츰 그 진폭이 작아졌다. 모니터를 보고 있던 지수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앰플 병을 손가락을 튕겨 땄다. "하트 레이트가 떨어집니다. 아트로핀 앰플 1cc 주입합니다." 지민이 말했다. "올려 주세요." 그녀가 앰플 안의 용액을 주사기로 빨아들였다. "2cc로 올립니다." 그녀는 링거 선에 아트로핀을 주입했다. 지민은 손에 삼각형 모양으로 떨어져 나온 골 조각을 쥐고서 현수를 향해 지시했다. "듀라 섹션해요!" 현수가 자리를 바꾸어 뇌막을 걷어 내는 동안 간호사가 렌즈 부분만 구멍을 내 놓고 비닐 로 싼 대형 스코르를 환자의 머리 위에 위치시켰다. 지민이 그 앞의 기계의자에 앉아 페달 을 누르자 의자가 로봇처럼 윙윙거리며 환자에게로 다가갔다. 그때였다. 현수가 지민의 앞을 가로막았다. "안지오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지민이 힘을 주어 말했다. "기다리면 죽어!" 현수는 그래도 정색을 하며 말했다. "잘못하면 징계 받습니다." 이때 계기판을 관찰하던 지수가 긴장하며 말했다. "힘들 것 같습니다! 하트 레이트가 없어요!" 그녀는 재빨리 또 다른 주사를 주입하고 지민은 현수를 제치고 스코프에 눈을 갖다 대려 다가 지수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절망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잠시 후, 스코프를 들 여다보던 지민의 눈이 극도의 긴장으로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그는 결국 스코프에서 눈 을 떼고 말았다. 그가 턱짓을 하자 간호사가 환자 위에 설치된 선반을 치웠다. 그때 흉부외과 지원팀들이 갱의실을 나와 마스크의 끈을 조여 매면서 3번 수술실로 향했 다. 그들은 수술실로 들어서려다가 말고 지민이 환자의 눈을 벌려 플래쉬를 비추는 모습을 보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모두들 지민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지민은 환자의 양쪽 동공이 완전히 퍼져 있는 것을 확인하고 서서히 구부리고 있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숨막히는 정적이 찾아들었다. 이윽고 심전도계의 시그널이 삐- 하고 늘어 지는 소리를 내며 플랫으로 변했다. 닥터 표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익스파이어했습니다... ." 모두들 맥이 풀리는 듯 고개를 떨구었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은 채 그대로 서 있었다. 지민이 침착하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타임 체크하세요." 현수가 벽에 걸린 시계를 보며 말했다. "환자의 사망 시각 02시 36분입니다." 흉부외과 팀들이 수술실을 나가 되돌아갔고 지민은 다시 환자의 머리 쪽으로 다가갔다. 그를 지켜보고 있던 지수가 시선을 딴 곳으로 돌려 버리고 말았다. 지민과 지수가 수술실을 나왔다. 그녀가 찝찝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야, 강 선생. 니 잘못 아냐... ." 그가 말없이 계속 걸었다. "어디 가?" 그는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보호자한테... ."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그는 계속 걸어갔다. 그녀는 잠자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통보하고 나 좀 만나."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응급실에 있을 거야." 그녀는 속이 상해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뒤에서 다른 의사들이 걸어나왔다.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환자가 사망할 때마다 크게 실망하는 그를 보면 가슴이 답답해졌다. 언젠가 어린 환자가 수술 도중 숨졌을 때는 그의 눈에서 눈물까지 반짝이는 걸 봤었다. 그녀는 수술이 끝나고 나오는 그를 데리고 호프집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그에게 의사는 환 자의 병을 치료할 뿐이지 운명을 바꿀 수는 없다고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은 하고 있어. 그래도 살릴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면 미쳐 버릴 것만 같아. 살아났으면 그애는 조금만 지나면 마음껏 뛰놀 수 있을 것 아니니." "잊어버려. 어쩔 수 없는 일을 가지고선 그렇게 고민만 하면 뭐하니?" 그는 알아들은 듯 고개를 또 끄덕거려 놓고서는 술을 계속 마셔댔다. 결국은 평소에 잘 마시지도 않던 술에 금방 취해서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그녀는 그를 부축해서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를 방에 눕히고 옷과 양말을 대충 벗긴 다음 이불을 덮어 주고 그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아직까지 소년과도 같은 순수한 마음과 열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면서도 염려스러웠다. 앞으로 어떤 험한 일을 겪 으며 살지 모르는 의사 생활을 해야 하는 그가 큰 상처를 받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녀는 큰 변화가 오지 않는 한 언제까지나 신경외과 마취의로 옆에서 그를 지켜 주고 싶 었다. 사실 그의 마음을 차지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이고 싶지만 아직은 그가 마음을 열지 않아서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착잡한 마음으로 일어나서 그의 집을 나왔다. 호동은 현수가 기다리고 있을 의사 당직실로 찾아갔다. 문을 열자 현수가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호동이 그 앞에 고개를 숙이며 섰다. 현수는 고갯짓으로 옆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앉아." 호동이 조심스럽게 옆자리에 앉았다. 현수가 담배 한 개피를 그에게 건네고 자신도 하나 입에 물었다. 호동이 재빠르게 불을 붙여 주었다. 호동은 담배를 피우면서도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현수는 짜증을 내며 목소리를 깔았다. "나도 별로 이런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 그런데 사실 넌 해도 너무한 거 알지?" 호동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 압니다." 호동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현수가 되받았다. "뭘 아는데?" 호동은 고개를 더욱 숙였다. "제가 잠이 좀 많아서... ." 현수가 담배 연기를 자욱하개 내뿜었다. "그거는 그거고... ." 호동이 놀라 물었다. "그... 그럼?" 현수가 인상을 팍 썼다. "좀 씻고 다녀!" 호동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환자들하고 다른 선생들이 네가 오면 정신을 못 차리겠대. 하도 냄새가 나서... !" "죄... 죄송합니다." 현수는 한심한 호동을 한참을 쳐다보가다 문을 쾅 닫고 나가 버렸다. 그러자 금세 표정 이 바뀐 호동이 투덜거렸다. "내 참, 씨팔! 목욕할 시간이라도 주면서 지랄을 하던가... !"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에 다시 쾅 소리를 내며 열렸다. 호동이 화들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문 입구에는 덩치가 좋은 사내 하나가 느글거리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가 궁금한 표정으로 일어선 호동에게 물었다. "강지민 선생이 누구요?" "무... 무슨 일로 찾으시는데요?" "아, 나야 볼일이 있으니까 찾지! 잔말 말고 앞장서라구!" 호동이 엉거주춤 밖으로 나갔다. 호동의 뒤를 사내들 세 명이 따라갔다. 그들이 의국에 들어서자 현수가 나서서 물었다. "야, 박호동 뭐야? 어떤 사람들인데 여기까지 데려왔어?" "아, 그게... ." 더듬거리는 호동을 밀치고 그 중의 한 사내가 협박하듯 말했다. "강지민 선생 어딨어? 여기 있는 거 맞지? 어딨어!" 현수가 그들을 막아 서며 말했다. "여기는 함부로 들어오시면 안됩니다. 용건을 말씀하세요." 사내는 눈을 잔뜩 부라렸다. "멀쩡한 사람을 생체 실험 해 놓고 이렇게 앉아만 있으면 다야? 여기가 사람 살리는 데 지, 죽여서 실험하는 데야? 엉?" 인상이 아주 험악해 보이는 나머지 두 사람은 의국 안을 어슬렁 거리며 돌아다녔다. 앉 아 있던 의사들이 겁을 집어먹고 슬슬 뒤로 물러서거나 그들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안쪽에서 소란스런 소리를 들은 지민의 얼굴이 굳어졌다. 현수가 한사람을 저지하는 동안 다른 한사람이 책상 사이를 돌며 서류뭉치와 책들을 바닥 으로 집어던졌다. "멀쩡한 사람 골을 쪼개 놓고 늬들은 폼만 잡고 있으면 다라 이거지? 개 돼지도 죽으면 보상을 받는 판국에 사람을 죽여 놓고 나 몰라라 하면 그냥 넘어갈 줄 알았어?" 두 사내의 난동이 갈수록 심해지자 지민이 그들 쪽으로 나왔다. 그러자 덩치가 제일 큰 사내가 지갑을 꺼내어 형사 신분증을 확인 시켜 주었다. 지민이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사내는 느글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강지민 선생이죠? 뭐, 별 거 아닌데 잠깐 같이 갑시다." 그때였다. 죽은 노인 환자를 데리고 왔던 40대 여자가 상복을 입고 들이닥치더니 다짜고 짜 지민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잡았다. 그녀는 지민을 잡아먹을 듯 소리쳤다. "이놈아! 너지! 네가 멀쩡한 우리 남편 시체로 만들어 놓은 놈이지! 살려 내! 살려 내 란 말이야!" 그녀는 덩치 큰 사내에게 말했다. "오빠! 빨리 이 자식 안 잡아가고 뭐하는 거야!" 40대 여자가 멱살을 잡고 흔드는 동안 지민은 무표정한 얼굴로 여자의 얼굴을 쳐다보았 다. 그의 눈과 그 여자의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이 여자의 눈을 파고들었다. 그의 눈에 그녀의 비밀스런 죄악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여자의 집이 보였고 마루가 보이더니 안방인 듯한 방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갔 다. 거기에는 고급스런 이부자리가 깔려 있었고 그 위에 핏기 없고 병색이 완연한 노인이 한쪽 팔에 링거 주사를 꽂은 채 누워 있었다. 여자가 노인에게 다가가 앉았다. 노인은 기 척을 느끼지 못하고 그대로 누워 있었다. 여자는 주저 없이 큰 주사기를 노인의 팔뚝에 꽂았다. 바늘 끝이 혈관 속을 파고들자 노 인이 눈을 떴지만 기력이 없어 그대로 보고만 있었다. 여자가 주사기의 피스톤을 천천히 뒤로 빼자 거기에 검붉은 정맥혈이 한가득 채워졌다. 여자는 주사기를 뽑아 들고 방 한 구 석에 놓여있는 커다란 행운목 쪽으로 갔다. 여자는 크고 잘 자란 행운목의 뿌리가 박혀 있 는 화분 속으로 주사 바늘을 꽂았다. 노인의 피가 화분속에 주입되고 커다란 행운목은 그 피로 건강함을 유지하는 듯 잎들이 푸르고 윤기가 났다. 그런데 갑자기 노인이 여자의 두 에서 도자기를 머리 취로 치켜들고 내리치려고 했다. 그러나 엉거주춤 서서 사지를 떨며 지탱하고 서 있던 노인이 머리를 뒤로 젖히는가 싶더니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지민이 뚫어지게 바라보자 여자가 찔끔하더니 이내 다시 멱살을 흔들어 대기 시작했다. 그러자 지민이 여자의 손목을 억세게 움켜쥐었다. 그는 번뜩이는 눈빛으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천벌을 받을거야! 피를 먹고 자란 그놈의 뿌리가 머지않아 네 심장 속을 파고든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는 얼어붙고 말았다. 그리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를 못했다. 여자는 브로커 두 명과 덩치 큰 남자에게 뭐라고 하더니 다투듯 황급히 의국을 빠져나갔 다. 그들이 떼를 지어 병원 문을 빠져나가자 그 문을 통해 깡마른 남자 한 사람이 들어섰 다. 의사 가운을 입기는 했지만 별로 의사같아 보이지를 않았다. 그의 얼굴에서는 어딘지 모르게 광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는 날카롭게 병원을 쓰윽 둘러보더니 에스컬레이터 쪽으 로 갔다. 최 간호사는 외래 환자와 이야기를 하고 있다가 인터폰이 울리자 과장실로 들어갔다. 이 과장은 비디오 테입을 하나 건네 주었다. 테이프 위에는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는데 거기에는 미국 어딘가의 주소가 쓰여져 있었다. 최 간호사가 언뜻 보니 무슨 컴퓨터 회사 인 것 같았다. 이 과장이 말했다. "내가 전화를 해 놨으니까 그 주소로 보내기만 하면 돼. 제일 빠른 우편으로 부쳐 줘." "잘 포장해서 이 주소로 보내기만 하면 되는 거죠, 과장님?" "음, 비디오 테입이니까 배달 도중에 깨지지 않게 포장을 잘해야 할 거야, 그리고... ." "네?" "2주쯤 지나면 다른 테입이 하나 올거야. 혹시 내가 학회에 참석하고 있을 때 오게 되면 딴 사람한테 주지 말고 내 책상의 맨 윗 서랍에 넣어 둬요." "알겠습니다." 최 간호사가 문을 닫고 나가려 하자 그가 다시 불렀다. "지금 강지민 선생 어디 있지?" "호출을 할까요?" "일단은 나한테 먼저 연결시켜 줘요." "네." 최 간호사가 나가고 나자 이 과장은 입을 굳게 다물고 컴퓨터의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에는 영어로 잔뜩 써 놓은 논문의 중간 페이지쯤이 보이고 있었다. 과장실을 나온 최 간호사는 곧장 지민에게 호출을 했다. 지민은 그때쯤 브로커들과 한 차례 소란을 피우고 난 뒤였다. 최간호사는 가가 전화를 해 오자 곧바로 과장실로 연결시켰다. 이 과장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30분 뒤면 곧 회의가 소집될 거니까 회의실로 오게나. 자네의 요건 수술 건에 관한 회 의네." "알겠습니다." 지민은 전화를 끊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자신으로서는 환자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밖에는 없었다. 그는 한참 동안 꼼짝도 않고 앉아 있다가 시간이 되자 일어섰다. 가운을 벗어 의자에 내팽개치고는 양복 저고리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회의실에는 길다란 테이블을 둘러싸고 교수진들 6명이 앉아 있었다. 지민은 상석에 앉은 이석명의 맞은편으로 가서 섰다. 교수 한 명이 아주 못마땅하다는 투로 말했다. "지난번에 교통사고로 12병동에 입원한 환자의 보호자가 병원장님께 협박을 해 대는 통에 의료 사고에 대해서는 아주 민감해져 있는 형편이에요. 시기가 좋지를 않아요... ." 지민은 굳은 표정으로 눈을 내리 뜬 채 말했다. "... 각오는 하고 있습니다." 이 과장은 강렬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교수는 발끈해서 말했다. "각오를 하고 있다니... ? 자네 행동에 대해서 후회 없다는 뜻인가?" 그는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최대한 빨리 손을 쓰는 방법 이외에는 없었습니다." 다른 교수가 끼어들었다. "자네 혹시 스스로를 너무 과신하는 것 아닌가?" 그는 눈을 들어 방금 말을 꺼낸 교수를 쳐다보았다. 그 교수가 계속해서 말했다. "자넨 아직 레지던트 4년차야. 더구나 안지오그램에 의한 뇌지주막하 출혈에 관한 케이 스를 한 번도 OP 해본 적이 없을 테고... . 스스로 너무 앞서 간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지민은 어느 정도 자존심이 상해서 다시금 눈을 내리뜨고 있을 뿐 대꾸를 하지 않았다. 처음 말을 꺼낸 교수가 노기 띤 목소리로 말했다. "의국장은 자신의 의료 행위에 대한 과신보다는 의국 내의 규칙과 질서를 우선으로 여길 줄 알아야지. 더구나 아직까지 자신의 과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자네 태도가 문제란 말 이야." 지민은 교수를 외면하고 이 과장을 쳐다보았다. 그는 한 치의 양보도 않을 듯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지민은 결국 시선을 떨구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이 과장이 차분하고 내정하게 말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지나친 휴머니즘보다는 자기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이성적인 판단이 더욱 중요해. 아무튼 우리로선 그냥 넘기기 힘든 일이야... . 교수 위원회의 결정이 내려지 기 전 까지 모든 OP에서 손을 떼. 그리고 이번 추계학회에는 빠지고 근신하도록 해." 지민이 힘없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이 과장이 말했다. "나가 봐!" 지민은 고개를 숙이고 회의실을 나갔고 이 과장은 그가 나갈 때까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지민은 생각에 잠긴 채 복도를 걸어가다가 갑자기 머리에 심한 통증을 느끼고는 허리를 굽히며 머리를 두손으로 눌렀다. 얼른 고개를 들고 주위를 살펴보니 그를 본 사람은 없었 다. 그는 되도록 태연한 얼굴을 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비상구 계단을 통하여 지하실로 내 려갔다. 그는 보일러실로 들어갔다. 그곳은 비상시에 병원에 자체 전력을 공급할 수 잇는 커다란 발전기가 한 쪽 벽에 위치해 있고 굵은 파이프와 복잡한 구조물들이 벽과 천장을 관통하고 있었다. 그는 구석으로 달려 가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나지막히 신음을 토해냈다. 신음소리는 이내 기계들의 웅웅거리는 소리에 묻히곤 했다. 그는 벽에 몸을 기대고 서서 한 손은 벽을 짚고 다른 한 손으론 머리를 감싸 쥐며 심하게 구토를 했다. 심하게 구토를 하기는 했지만 막상 입에서는 침만 흘러나왔다. 갑자기 응애~ 하는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쥔 채 갑자기 몸을 돌렸다. 순간 풀숲에, 풀숲 사이에 두세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허연 눈동자를 하고 귀에서 굵 은 고름덩이가 터져 나온채 누워 있는 모습이 보였다. 지민이 으헉! 하며 비명을 터뜨렸다. 그는 눈동자가 풀린 채로 흐느적거리는 팔을 뻗어 쇠파이프 하나를 감싸 안았다. 누군가 가 풀숲을 헤치고 뛰어가고 있었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아홉 살 난 소년은 헉헉거 리고 있었다. 지민은 머리를 양손으로 누르고 있다가 더 이상 고통을 참지 못하고 벽에 몸을 갖다 부딪 쳤다. 그러나 또다시 응애 하는 아기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풀숲 사이에 죽은 아기의 모습이 다시 나타났다. 그 뒤를 이어 으악하고 소리지르는 소년의 비명이 들렸다. 지민은 머리를 흔들며 몸을 돌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무당 옷을 입고 진한 화장을 한 얼 굴로 자신을 노려보며 괴상한 웃음을 짓고 있는 30대 후반의 무녀의 모습이 그를 덮쳤다. 그는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이 그의 얼굴에 닿았지만 그는 의식이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 지민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겨우 눈을 떴다. 그러나 극심한 고통 때 문에 식은땀을 흘려 대며 힘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눈동자를 덮어 갈 즈음 보일러실 어느 한 구석에서 조그만 무엇인가가 허공으로 떠오르는 게 보였다. 지민은 힘없는 눈으로 애써 초점을 맞추어 보았다. 바람도 없는 보일러실인데 그것은 조그만 천조각인듯 나풀거리며 그에게로 다가왔다. 그 것이 무엇인지를 보려고 눈꺼풀에 힘을 주자 그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그것은 나비였다. 어디서 어떻게 들어왔는지 조그만 노랑나비 한 마리가 날갯짓을 하며 그에게로 날아왔다. 그는 눈에 경이로움을 담은 채로 나비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나비는 그의 아픈 몸을 핥 아 주기라도 하려는 듯 주위를 이러 저리 날아다니다가 어깨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그 리곤 아주 천천히 날갯짓을 하며 그의 어깨를 떠나지 않았다. 지민은 눈이 스스로 감겼다. 그의 입가에 평온한 미소가 서렸다. 4 지민은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가운을 챙겨 입고 너무나 말끔한 모습으로 71병동 의 복도를 걸어 데스크 쪽으로 걸어갔다. 간호사가 차트를 들고 벽에 걸린 입원환자 기록 판에 뭔가를 적어 넣으려다가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물었다. "혹시 정필순 환자 MRI 사진 여기 있습니까?" 간호사는 들고 있던 매직펜을 놓고 다가왔다. 그리고 책상 아래에서 사진을 꺼내 주었다. "네, 여기요... ." 지민은 사진을 받아 들자 벽 쪽으로 다가가 형광판 위에 사진을 걸었다. 그는 유심히 사 진을 살피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진을 다시 봉투에 놓으며 기록을 하고 잇는 간호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오늘 날짜로 입원한 새 환자의 이름을 적어 넣고 있었다. 날짜:8/30 이름:오새연 성별:F 나이:19 입원실:특실 7121 지민은 간호사가 기록하는 것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다가 마지막으로 병명을 적어 넣자 이 맛살을 찌푸렸다. '병명:G.M.' 그가 물었다. "새로 입원한 환자인가요?" 간호사가 돌아보며 말했다. "네... . 오늘 아침 특실이에요." "19세인데... 글라이오브라스토마 멀티폼이에요?" "좀 안됐어요... . 전에도 다른 병원에서 수술을 몇 번 했었대요." 그는 물끄러미 기록판의 호실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며 말했다. "수고하세요." 그는 모퉁이를 돌아 특실 쪽으로 걸어갔다. 복도 끝에 위치한 특실로 다가가자 서태지풍 의 랩음악이 크게 들려왔다. 그는 약간의 의외인 듯 병실 문 앞에 서서 주춤했다. 입원 환 자의 이름이 '오새연'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노크를 했다. 그러나 음악소리만 크게 들려올 뿐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그는 다시 한 번 세게 노크를 했다. 역시 응답이 없었다. 문고리를 잡아 돌려 보니 문이 열렸다. 그는 안으로 들어갔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이 고급 버티칼에 나뉘어져 길다란 조각으로 흩어져 있었다. 안 에는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테이블위에 크게 틀어진 카세트가 눈이 띌 뿐이었다. 그 는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 카세트의 버튼을 눌렀다. 그제서야 잠잠해졌다. 꽤 많은 화환들이 테이블과 선반 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침대 쪽을 보니 베개 주변으로 수십권의 만화책이 쌓여 있었다. 그 중 한 권은 방금 보았던 듯 펼쳐진 채로 베개 위에 뒤 집어져 있었다. 그는 침대로 다가가 무심코 만화책을 집어 들었다. 환상적이고 화려한 터 치로 사랑하는 남녀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황미나풍의 순정만화였다. 무표정하던 지민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만화책 사이에 말보로 레드 담배가 뚜껑이 열린 채 성냥과 함께 놓여져 있었던 것이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성냥과 담배를 집어들 었다. 그러고는 다시 한 번 병실 안을 둘러보고 나갔다. 병실을 나온 지민은 손에 쥐고 있던 담배를 꺼내 보다가 주머니 속에 넣어 버렸다. 그는 비상구 계단으로 나갔다. 문을 열고 몇 걸음 옮기다가 위를 쳐다보니 어떤 여자애가 창 밖에서 뿜어져 들어오는 강 한 햇살을 마주하고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녀의 옆얼굴의 실루엣이 선명하게 보였 다. 헐렁한 환자복 안의 야윈 몸과 좁은 어깨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한 걸음 한 걸음 세듯이 계단을 올라갔 다. 그녀가 들고 있던 종이컵을 입으로 가져갔다. 얇고 창백한 분홍빛의 입술 사이로 맑은 침이 보이는가 싶더니 컵 안으로 떨어졌다. 담배 꽁초를 그 안에 넣자 치이익 하는 소리가 나며 몇 줄기의 연기가 올라왔다. 계단을 오르던 지민이 중간쯤 이르자 여자애가 지민 쪽으로 몸을 돌렸다. 염색을 한 짧 은 커드 머리 때문인지 약간 불량기를 풍겼지만 얼굴은 맑고 깨끗했다. 그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그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계단을 내려왔다. 그녀의 등뒤에서 쏟아져 들 어오는 강한 햇살 때문에 환자복 속으로 비치는 야윈 몸매가 그의 눈을 자극했다. 두 사람 은 자욱한 연기 속에서 서로를 스쳐 지나갔다. 그가 다시 한 번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녀도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자기도 모르 게 움찔하자 그녀가 피식 웃어 주었다. 인사인지 비웃음인지 모를 묘한 웃음에 그는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뭔가에 흘린 사람처 럼 멍해진 그는 계단을 내려가는 그녀에게 말을 걸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녀가 문을 열고 복도를 나갈 때까지 그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지수는 마취과 의국에서 컴퓨터로 다음 주에 잇게 될 수술의 마취 스케줄을 잡고 있었다. 그녀는 똑똑똑 노크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네." 그녀의 대답 소리에 문이 살며시 열리고 가운을 입은 산부인과 의사 두 사람이 들어왔다. 그들은 각각 참치 캔 한 박스와 음료수 한 박스를 들고 있었다. 그들은 지수를 보자 반색 을 했다. 산부인과 의사 중 나이가 더 많은 사람은 지수와 동창이었다. 동창인 서경철이 말했다. "아이구, 표 선생님 계셨군요." 지수는 힐끗 한 번 쳐다보더니 하던 일을 계속했다. "웬일이야?" 경철이 곤란한 얼굴을 하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에이~ 다 알면서... ." "안 돼."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경철은 박스를 내려놓고 지수에게 다가갔다. 그는 사정조로 말했다. "닥터 표, 이번 한 번만 좀 봐줘라. 나도 이러기 싫다구." 그녀는 야멸차게 말했다. "싫음 안 하면 되잖아." 그는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지수를 설득했다. "이번에는 우리도 입장이 좀 곤란해. 우리 과장님하고 사돈지간 되시는 분인데 이번에도 리젝트하면 우리 방 전체가 애를 먹는다구." 그녀가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얘! 의사들이 하는 일이 뭐야? 적어도 현대 의학을 한다는 사람들이 세상에 태어날 애 를 사주 잡아 왔다고 시간에 맞추어 끄집어낸다는 게 말이 돼? 우리 과장님 성격 몰라?" "알지... . 아니깐 이렇게 내가 직접 내려온 거잖아. 부탁 좀 하자. 동기 좋다는 게 뭐 냐?" 그녀는 하던 일을 다시 시작했다. "안 돼." 그는 열이 좀 받치는 듯 한숨을 내쉬더니 턱을 내밀었다. 더 이상 못 참겠다는 표정이었 다. "야, 이등표! 이거 너무한 거 아냐?" 그녀가 그를 쳐다보자 그는 따지듯 말했다. "젠장, 난들 하고 싶어서 이짓 하니? 서로 어려울 때 사정 좀 봐주면 안 돼?" 그녀가 말했다. "사정은 벌써 몇 번인가 봐줬어. 더구나 다음 주엔 NS OP가 7개나 잡혀 있는걸 어떡해? 사람 살리는 수술을 미루고 고작 미신의 발바닥에 입이나 맞추는 수술을 잡으라고?" 그는 화가 나서 그녀를 노려보더니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미신의 발바닥에 입을 맞춰? 좋다. 우리가 미신 발바닥에 입을 맞추면 넌 개인적인 사 랑 놀음에 OP스케줄을 마음대로 잡아도 되는 거야?" 그녀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뭐?" 경철이 지수를 아니꼽다는 눈초리로 바라보며 말했다. "너 솔직히 지민이가 OP 스케줄 가져와도 빵구 낸 적 있어?" 그녀는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너 입 함부로 놀리지 마." "좋아! 아무튼 이번 한 번만 해 줘." 그녀는 다시 컴퓨터 모니터를 보았다. "미안해. 어쨌든 이번 주는 안 돼." 경철은 약이 잔뜩 올라 지수를 노려보더니 같이 온 후배에게 소리쳤다. "야! 저거 도로 가져가!" 두 산부인과 의사는 박스를 도로 집어들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어이, 마취과 표지수 선생님." 경철은 나가려다 말고 문 앞에 서서 지수에게 말했다. "내 충고 한마디 할게. 사실 마취과 너희들 대학 병원이니까 OP 스케줄 갖고 목에 힘주 는데 나중에 일반 종합병원에서 그랬다간 아주 고학력 실직자 되기에 알맞을 거야. 우리, 나중을 생각해서 서로 돕고 살자, 응?" "충고 고마워. 대신 나도 충고 한마디 할게. 네 말대로 여긴 대학병원이지 태아들 성별 이나 구별하고 사주에 맞게 애나 낳게 해주는 곳이 아니야. 제발 의사면 의사답게 행동해." 경철은 밖으로 나가 문을 닫으며 말했다. "알았어. 우린 의사답게 행동할 테니까 너희들은 열심히 NS 발바닥이나 핥아라." 지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야!" 그러나 문은 쾅 소리내며 닫히고 말았다. 지수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잠시 서 있다가 애써 분을 가라앉히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키보드를 몇 자 두드리다가 문득 동장을 멈춘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입술을 깨물 며 생각에 잠겼다. 그에 대한 특별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던 것 같았다. 그녀로서도 어쩔 수 없었던 것은 시간을 다투며 꺼져 가는 생명을 살리려고 애를 쓰는 그를 보면 우선적으로 수술 스케줄을 잡아 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에게 의사라는 직업은 천 직처럼 보였다. 물론 의사들은 대개 생명에 대한 애착과 경외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가끔은 자기의 이득이나 명예를 생각하기 마련이고 일을 하다 보면 열정도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지민은 참으로 예외였다. 세상을 살 만큼 산 노인이나 죄를 지은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 등 그가 소중히 여기지 않는 생명을 없었다. 그는 그 중에서도 어린아이들의 생명에 유독 집착하였다. 그건 아마도 그가 어린아이를 세상 어떤 것보다도 고귀하게 생각 해서일 것이다. 지수는 눈을 감고 누구보다 따뜻한 마음을 지녔으면서도 차갑고 깔끔한 이미지만 풍기고 다니는 그를 생각했다. 그를 이해하면서도 그에게 서운한 것이 있다면 의사로서 모든 환자 들을 특별하게 생각하느라 여자를 특별하게 생각할 틈이 없다는 것이다. 지수는 눈을 떴다. 그리고 힘차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녀가 지금 가장 원하는 것은 그 를 바라볼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며 또 그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으로서는 만족해야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호출이 왔다. 또 응급 환자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수화기를 들었다. "네, 네, 곧 가죠." 그녀는 급히 의국을 나가 수술실로 뛰었다. 수술실에서는 벌써 환자의 수술 준비에 들어가고 있었다. 교통사고를 당한 환자였다. 응 급실에서 보면 교통사고 환자가 상당히 많은 편이었다. 수술대 위의 환자는 성한 곳이 없 었다. 척추부터 시작해서 팔 다리, 그리고 얼굴조차 상처가 많아 누구인지 알아보기도 힘들 었다. 새연은 침대에 누워 링거를 한 채로 만화책을 보고 있었다. 카세트에 연결된 조그마한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었다. 그런데도 소리가 크게 들리는 걸 보면 볼륨을 엄청나게 높여 놓은게 틀림없었다. 새연은 만화책을 보면서 웃음을 떠올리다가 이내 키득거리며 소리내어 웃기 시작했다. 그녀는 차츰 더 크게 웃더니 나중에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웃었다. 그때였다. 문이 빼꼼히 열리며 프랑켄슈타인의 흉측한 가면을 쓴 얼굴이 고개를 내밀었 다. 새연은 그만 소스라치게 놀라 짧은 비명을 지르며 만화책을 집어던졌다. 그러자 이번 에는 그 아래쪽으로 불쑥 드라큐라 가면이 쑥 튀어나왔다. 새연은 어리둥절해져서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두 가면이 코맹맹이 소리로 합창을 했다. "너 잡아먹으로 왔다!" 새연은 겁먹었던 얼굴을 펴고 활짝 웃었다. "왔구나, 너희들." 그들은 여고생 교복 차림에 가방을 멘 새연의 친구들이었다. 그들은 가면을 벗고 낄낄거 리며 새연에게 달려들었다. 세 사람은 서로 얼싸안으며 얼마나 반갑고 좋은지 "이 계집애, 저 계집애"를 연발했다. 새연의 두 친구는 겉으로 보아 모범생은 아닌 것 같았다. 한 사람은 새연의 머리에 스프레이를 뿌려서 머리칼을 세워 주었고 다른 사람은 조그마한 링을 이로 벌리고 있었다. 링을 벌리던 친구 미진이가 새연에게 자랑하듯 말했다. "나 요번에 남자친구 바뀌었는데... ." "그래? 언제?" "응, 한달도 안 됐어. 그 남자애가 날 따라다닌 지는 벌써 두달이 돼 가지만... ." "어머, 계집애! 네가 연애 박사가 맞기는 하나 보다." "사실 난 전혀 마음이 없었지. 사귀는 남자 친구도 있었고 해서 말이야. 근데 걔가 그렇 게 지성으로 쫓아다니니까 내 마음이 움직인 거지. 어제는 키스까지 했다니까." 새연이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짜야?" 스프레이를 뿌리던 경화가 끼어들었다. "그럼 진짜지. 걔가 자기 학교 짱이걸랑. 엄청나게 잘나가는 짱을 완전히 노예로 만들어 버린 거야." "그럼 넌 노예랑 키스한 거네?" 미진이 링을 새연의 코볼에 끼워 주며 키득거렸다. "내가 키스만 했겠니?" 새연이 깜짝 놀라 미진을 쳐다보았다. 눈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그럼?" 경화는 스프레이를 놓고 가방에서 조그만 카메라를 꺼내 들고는 선반으로 갔다. 미진이 아무렇지도 않은, 능청스런 얼굴로 말했다. "그저껜 서로의 가장 은밀한 부분을 어루만져 줬지." 새연이 소리치다시피 말했다 "정말이야? 미쳤구나, 너... ?" 경화는 그동안에 소형 카메라의 파인더를 보고 타이머를 맞추었다. 미진이 가면을 뒤집어 쓰며 말했다. "야! 둘 다 돈이 없어서 하루종일 걷기만 했더니 발이 아파서 서로 발가락 좀 주물러 줬 다, 왜?" 새연은 얼굴이 빨개지며 입술을 내밀었다. "피이!" 경화가 손을 들며 소리쳤다. "야, 준비됐어! 폼 잡아!" 새연과 프랑켄슈타인이 바짝 붙어 폼을 잡자 경화도 드라큐라 가면을 쓰고는 버튼을 누르 고 잽싸게 새연 옆으로 가서 앉았다. 세 사람은 입을 모아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 "셋!" 하는 순간 새연이 양손으로 친구들의 젖가슴을 움켜쥐었다. 프랑켄슈타인과 드라큐 라가 동시에 화들짝 놀라는데 카메라에서 찰칵 하는 소리가 났다. 그들의 웃음소리가 복도까지 울려 퍼졌고 간호사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새연은 오랜만에 기분 좋게 웃을 수 있었다. 물론 가슴 깊숙히 자리한 고통과 절망이 없 어지는 건 아니었지만 자신이 꿈많은 열아홉의 소녀라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있으니 겨우 제 나이에 어울리는 웃음을 웃을 수 있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죽음이 생각날 때는 자신이 마치 노인이 되어 버린 듯한 착각에 빠져 들곤 했었다. 수다스럽고 허풍을 잘 떠는 미진, 착하고 잘 웃는 경화, 새연이 그들과 시간 가는 줄 모르 고 웃고 떠들고 있는데 간호사가 인상을 잔뜩 쓰고 들어왔다. "오새연 씨, 치료받을 시간입니다. 다른 분들은 돌아가 주시기 바랍니다." 새연의 얼굴이 금세 어두워졌다. 간호사가 새연과 친구들을 번갈아 보더니 다시 나갔다. 미진과 경화가 가방을 들고 일어났다가 다시 새연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 주었다. "네가 빨리 나아가 학교에서 만났으면 좋겠어." 새연이 피식 웃었다. "기다리지 마. 난 어떻게 될지 몰라." "아냐, 넌 우리와 같이 학교생활을 할 수 있을 거야. 우린 아무래도 들어가기 힘들겠지만 넌 대학에도 갈 수 있잖아?" 새연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미진이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손뼉을 치더니 새연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너 하루쯤 치료 빼먹어도 괜찮지 않니?" 새연의 눈이 반짝였다. "뭐, 재미있는 일 있니?" 미진이 말했다 "응, 이따가 그 남자애 만나기로 했거든. 걔, 친구들이랑 같이 나오면 엄청 재미있게 놀 수 있는데." 새연이 조금 주저하는 듯하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래, 좋아!" 미진이 문을 빼꼼히 열어서 간호사가 오는지 안 오는지 확인한 다음 손짓을 했다. 새연 은 급히 옷을 갈아입었다. "새연아, 뭐해! 빨리 해!" "응? 응!" 대충 갈아입고 위에 걸칠 것을 하나를 더 든 다음 나가려던 새연이 걸음을 멈추었다. "얘들아, 잠깐만!" 미진이 서랍장 쪽으로 다시 되돌아가는 새연을 보고 짜증을 냈다. "뭐하는 거니? 계집애, 이러다가 들키겠다." 새연이 슬리퍼를 벗어 던지고 서랍장에서 꺼낸 검은색 단화를 신었다. 미진이 복도 모퉁이에서 데스크를 훔쳐보며 새연에게 물었다. "새연아, 비상구는 어디 있니?" "응, 저기." 세 사람은 다람쥐처럼 재빠르게 비상구로 갔다. 새연은 두 친구들 사이에서 머리를 푹 숙이고 병원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간 그들은 성공적으로 빠져나온 것이 기뻐서 환호를 하며 팔짝팔짝 뒤었다. 그들은 버스를 타고 명동으로 나갔다. 새연은 오랜만에 버스를 타는 거라 신기해서 사방 을 둘러보았다. "야, 버스가 많이 깨끗해졌는데?" 미진이 말했다. "그럼, 요금이 올랐는데." 미진은 그들을 캐주얼 의류를 파는 곳으로 데려갔다. 그곳은 학생들로 발 디딜 틈이 별 로 없을 정도로 복잡했다. 최신 유행가요를 얼마나 크게 틀었는지 귀가 다 얼얼했다. 미진은 먼저 자기가 입을 빨간색 미니스커트를 고르더니 새연을 끌고 장식품과 소품을 파 는 곳으로 데려가더니 모자를 하나 골라주며 써 보라고 했다. 가는 실로 짜여진 니트 모자 로, 꼭대기를 중간만 찝어서 네 귀퉁이가 트여 있었다. 세련되고 귀여워 보였다. 새연은 미진이 아이보리색으로 골라 준 것을 밝은 회색으로 바꾸어 들었다. "난 회색 옷이 많으니까 이게 더 났겠어." "그래, 써 봐. ... 역시 얼굴이 받쳐 주니까 모자도 살아나네. 얼마 전에 내가 이걸 사려 고 써 봤더니 경화가 모자 불행한 일 시키지 말라고 벗으라잖아." 경화가 말했다 "내가 언제? 그냥 좀 안 어울린다고 했지." "그게 그 소리지, 뭐! 어, 애들아 가자. 늦겠다." 미진은 그들을 끌고 피자 가게로 갔다. 미진의 남자 친구인 진구는 벌써 와서 친구들과 왁자지껄 떠들어 대고 있었다. 그들은 새연을 보고 속닥거렸다. "아쭈, 괜찮은데?" "야, 순진하게 생겼는데?" 미진이 진구에게 친구들을 소개해 주었다. "진구 너, 경화는 알지? 얘는 새연이야. 오새연." 진구가 아는 척을 했다. "아, 아파서 항상 병원에만 있다는 애?" 미진이 새연의 눈치를 보며 진구를 툭 쳤다. 새연의 얼굴이 대번에 빨개졌다. 진구가 입을 손으로 가리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미안해. 아는 척을 하려던 게 그만... ." 새연이 살짝 웃었다. "괜찮아." 그들은 피자를 큰 판으로 두 개를 먹었다. 다들 누가 뺏어먹을까봐 정신없이 먹는데 새 연은 구역질이 느껴져서 먹다가 말았다. 경화가 그녀를 챙겼다. "더 먹어, 얘." "아니야. 먹히지가 않아." 진구는 피자를 다 먹고 나자 미진에게 눈짓을 했다. "미진아, 오늘 가기로 했던 데 가자. 짝도 다 맞는데. 여자 셋, 남자 셋." 미진이 신이 나서 새연을 끌고 제일 먼저 나갔다. "야, 새연이 너 락 카페 못 가 봤지?" "왜? 지금 가려고? 난... ." "왜? 겁나니? 괜찮아. 우리 또래들 투성이야." 그들이 새연을 데리고 간 곳은 불빛이 현란하고 락 음악이 온 실내를 뒤흔드는 자그마한 곳이었다. 안에서는 주로 학생들이 음료나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일부는 춤 을 추었다. 새연은 들어가자마자 어지러움을 느꼈다. 새연의 맞은편에 앉은 남자아이가 그녀에게 맥주를 한잔 권했다. 그녀가 손을 흔들어 거 절했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권했고 그녀는 결국 한 잔을 다 마셨고 어지러움이 더 심해 졌다. 그리고 또 한 잔을 마셨다. 남자아이가 그녀를 끌고 넓은 공간으로 나가 춤을 추었다. 새연의 눈에 그 남자아이가 춤을 추는 게 보였다. 그러나 그 아이 혼자서만 추는게 아니 었다. 서 있는 사람들이 다 흐느적거렸고 벽도, 의자도, 테이블도 흔들리고 있었다. "새연아! 새연아!" 새연은 자기를 부르는 소리가 아득해지며 눈앞에 캄캄해지는 걸 느꼈다. 어디선가 사이 렌소리가 나고 몸이 공중에 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새연은 머리가 무겁고 아픈 것을 느끼며 눈을 떴다. 눈을 떠 보니 지민이 뭔가를 적고 있었다. 둘러보니 그녀는 자기의 병실 침대에 누워 있었다. 새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저씨... ." 지민은 무척 화가 났는지 쳐다보지도 않았다. 새연이 애처롭게 다시 그를 불렀다. "아저씨!" 지민은 이번에도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돌아서서 가라려 했다. "아저씨, 너무해요. 내 이야기는 들어 주지도 않고... ." "무슨 이야기? 답답해서 친구들이랑 한 번 어울린 것뿐이라는 소리 아닌가?" 새연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금방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아저씨도 한 번 병실에서만 지내 보세요. 저처럼 친구들이랑 어울리고 싶어질 걸요." 지민이 다시 다가와 그녀의 눈을 부드러운 표정으로 들여다보며 말했다. "앞으로 다시는 그러자 말아요. 큰일날 뻔했어요." 새연은 울먹거릴뿐 아무 말이 없었다. 지민이 말했다. "대답해요. 다시는 나가지 않겠다고." 새연을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민이 슬그머니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미진이 그녀에게 사 준 모자였다. "오새연 환자 거죠? 어제 응급실에 떨어져 있었어요." 새연이 나가는 그의 등에 대고 말했다. "고마워요, 아저씨." 5 지민은 오후 일이 끝나자 그날을 곧바로 집으로 향했다. 몸이 별로 좋지가 않았던 것이 다. 그는 자신의 몸의 변화를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이들을 수술해서 살려 내고 나면 꼭 그에게 고통이 찾아왔다. 그것은 수술한 아이들이 병이 낫지 않고 있었다면 겪었을 그 런 증상과 똑같았다. 평상시에는 그래도 참을만 하다가 증상이 심해지는 때가 종종 있었다. 그는 불안하고 고통스러웠다. 거부할 수 없는 어린 환자들에 대한 집착 때문이었다. 고 통을 피하고 싶은 마음에 응급으로 들어오는 어린 환자를 외면하려 하면 동생의 울음소리가 그를 괴롭혔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수술을 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그가 고통을 당했다. 그는 학생시절부터 살던 2층 양옥집의 2층 한켠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조그마한 부엌이 딸린 방이었다. 집에서 식사를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부엌은 사람도 한 번 다니 지 않은 곳처럼 깨끗했다. 그는 방구석에 웅크리고 앉았다. 불도 켜지 않고 어둠 속에 앉아 있는 그의 눈에서 광채 가 느껴졌다. 어둠 속에 앉아 있으면 어머니가 굿하는 장면이 선명하게 보이곤 했다. 북소 리와 방울소리, 심지어는 사람들이 시끄럽게 빌거나 떠드는 소리까지 들렸다. 한참을 그러다 보면 신명나는 굿 장단에 몸을 움직이고 싶은 욕구가 솟아올랐다. 억지로 참고 있으면 몸에서 경련이 일어나기도 했다. 어머니는 너도 신이 내려서 그러는 거라고 했다. 그것을 거부하며 살기는 힘들 거라고도 했다. 지민은 어떻게든 펑범해지고 싶었다. 사실 그는 어떤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고 유심히 지켜보면 자기도 모르게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보였다. 상대방에게 앞으로 일어날 위험까지도 보이곤 했는데 그런 경우에는 말을 해 주고 싶은 충동을 참기가 어려웠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에게 무당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남들 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가 한 번 그 충동을 참지 못하면 앞으로 펑범하게 살 기회를 잃고 말 것이다. 모든 사 람들의 운명은 그가 막으려 들어도 원래대로 움직여 갈 것이라는 생각으로 절대로 관여하지 않았다. 그는 책을 통해 알게 된 위편호 교수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위 교수는 현대의학과 무술의 접목성과 관련가능성, 그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진 사람 이었다. 그는 그가 책을 낸 출판사에 전화를 해서 그의 연락처를 알아냈다. 그가 전화를 했을 때 위 교수는 대단한 관심을 나타냈다. 그는 위 교수의 집으로 찾아갔다. 위 교수의 집은 전통 한옥으로, 안으로 들어가니 뛰어난 감각의 인테리어로 고풍스런 분 위기를 잘 살리고 있었다. 위 교수가 현관을 나와 그를 반겼다. "어서 오게나. 기다렸다네." 지민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진작부터 찾아 뵙고 싶었습니다." 위 교수가 그를 데리고 서재로 갔다. 그들이 방석 위에 자리를 잡고 앉자 중년의 여자가 차를 내왔다. 지민은 뜨거운 녹차를 조심스럽게 마셨다. 지민이 말했다. "어렸을 때부터 신기라는 걸 느끼고 자랐습니다." 위 교수가 날카로운 눈빛을 하며 그에게 물었다. "그게 신기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나?" 지민이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어머니가 무당이십니다." 위 교수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음, 그랬었군. 그러니까 자네는 지금 그 신기를 버리고 싶다는 게 아닌가?" 지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위 교수가 심각한 얼굴로 분명하게 말했다. "신기는 신기로 치료하는 방법밖에는 없네." 지민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자네 지금 의사라고 했었지?" 지민은 다시 고개를 들어 위 교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처음엔 잘 몰랐는데 곧 죽을 수밖에 없는 어린아이를 보기만 하면 어렸을 때 죽은 동생 의 울음소리가 들리면서 저도 모르게 그 환자를 꼭 살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그런 생각이 강해지면 저의 온몸에 기가 모아집니다." 위 교수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나서 그 환자는 어떻게 되었나?" "살아났습니다. 현대의학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일이죠. 다른 의사들 같았으면 아예 수술할 엄두도 내지 않았을 겁니다." "바로 그거네. 그게 바로 현대의학에 기 치료를 병행했을 때 나오는 결과지. 그렇지만 자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이 미쳤을 법도 한데?" "네, 좀 고통스럽습니다." "그럴 거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럼?" "내가 말했지 않나. 신기는 신기로 치료해야 한다고." "그럼... ?" "굿을 한번 해보세나."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위 교수는 지민이 굿을 하기를 꺼려한다는 것을 알고 마음이 결정되면 연락을 하라고 했 다. 지민은 고민스런 표정으로 그에게 인사를 하고 나왔다. 그는 위 교수를 만난 지가 벌써 일주일째 되어 가지만 아직까지 연락을 하지 않고 있었 다. 두렵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굿을 하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가 굿을 해 주고도 죽고 말았던 사람이 떠올랐다. 어머니에게 쏟아지던 비난의 소리들! 그는 어머니를 미워하지는 못했지만 어머니의 삶은 싫었다. 동생이 죽은 이유가 다 그런 데 있었다고 생각되었다. 그가 시도 때도 없이 공부 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이제 어머니로부터, 어머니와 같은 인생에서 벗어나려는데 굿을 하라니! 그는 머리를 움켜쥐었다. 순간, 그는 엄청난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한 족 구석에서 다른 쪽 구석까지 떼굴떼굴 굴렀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책상 옆 에 놓인 휴지통을 가져와 뚜껑을 열었다. 거기에다 대고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내장까지 다 넘어올 것 같은데도 아무것도 넘어오지 않고 그를 괴롭혔다. 그는 바닥에 얼굴을 댄 채로 엎드렸다. 일어나 머리를 벽에 부딪쳐 봤다. 통증은 가시지 않았다. 전화벨이 울렸다. 한참을 울려 댔지만 도저히 받을 수가 없었다. 그의 입에서 억지로 고 통을 참아 내려는 신음이 터져나왔다. 잠시후에 전화가 다시 울렸다. 그는 수건으로 땀을 닦고 전화를 받았다. 지수였다. "야, 강 선생! 무슨 일 있어? 아님 어디가 아픈 거니?" "... " "강 선생. 이봐, 강지민! 너 왜 그래!" "아니야, 잠깐 정신이 없어서... ." "강 선생, 내가 너희 집으로 갈까?" "아니야, 아니야, 괜찮아." "괜찮지 않은 것 같은데?" "지수야, 나 좀 쉬고 싶어." "... 그래. 걱정이 되어서 전화했어." "고마워." 그는 비오듯 흐르는 식은땀을 천천히 닦아 내고는 한숨을 돌렸다. 통증이 좀 가라앉은 것이었다. 그는 아무래도 뇌를 찍어 봐아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옷을 갈아입고 만일을 위해 구해 두었던 MRI 촬영기계 매뉴얼과 촬영실 열쇠를 찾 아서 호주머니에 넣었다. 다시 병원으로 갔다. 지민은 MRI(자기 공명 영상) 촬영실이 있는 복도에 숨어 들었다. 촬영실에 사람이 없을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별일이 없으면 아마 이 시간쯤에 저녁 식사를 하러 갈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그가 얼마 기다리지 않아서 촬영실의 자동문이 열리고 세 사람의 촬영 기 사들이 나왔다. 맨 마지막에 나온 사람이 자동문 상단에 열쇠를 꽂자 삐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잠겼 다. 촬영실 앞을 지나던 경비가 가볍게 목례를 하며 물었다. "식사하러 가세요?" 기사 한 사람이 대답했다. "예... . 저 오늘 당직인데 식사하고 금방 올테니깐 나중에 들러요. 바둑 한판 두게." 경비가 기분 좋게 웃었다. "하하. 그러죠, 뭐." 기사들과 경비가 사라지자 몇 초 후 지민은 주위를 경계하며 자동문 앞까지 갔다. 호주 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전자단말기에 넣고 돌리자 삐익- 하는 신호음과 함께 자동문이 열렸 다. 그는 얼른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양복을 벗고 넥타이와 와이셔츠도 벗었다. 시계를 풀고 지갑도 꺼냈다. 구두를 벗 어 바지춤에서 빼낸 허리띠와 함께 양복 저고리에 싸 두었다. 옷다발을 입구 쪽 책상 밑에 넣고 재빠르게 컨트롤 컴퓨터 앞쪽으로 가 앉았다. 그는 뒤 호주머니에서 매뉴얼을 꺼내더니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입력이 끝나자 유리벽 안의 거대한 장비가 낮게 웅- 소리내며 전자기를 방출했다. 그는 호흡을 가다듬고 촬영실 하늘로 들어갔다. 침대는 벌써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는 그 위에 올라가 누운 다음 원통형의 구멍 안으로 머리를 집어넣었다. 웅- 하는 소리가 약간씩 증폭되어 갔고 그는 눈을 뜬 채 묵묵히 누워만 있었다. 잠시 후 그는 침대에서 내려와 필름을 뽑았다. 그리고 필름을 형광판에 걸어 놓고 자세 히 들여다보았다. 그때였다. 바깥에서 구둣발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 는 순간 자동문이 열리고 말았다. 지민은 재빨리 유리벽 아래로 몸을 숨겼다. MRI기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 이게 왜 안 잠겼지?" 기사는 인터폰을 들어 경비실을 눌렀다. 경비실에서 제복을 입고 의사에 비스듬히 기대어 모니터 대신 TV를 보고 있던 경비원 두 사람 중에서 나이가 지긋한 사람이 전화를 받았다. 기사가 물었다. "경비실이죠? 예, 여기 MRI촬영실인데요. 혹시 여기 문, 누구한테 열어 주신 적 있으세 요?" 지민은 몸을 숨긴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네? 없다고요? 알겠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기사는 두리번거리며 왔따갔다 했다. "내 지갑이... ." 기사는 기계실의 문을 열어 보더니 지갑을 발견하고는 그리로 들어갔다. 그 사이에 지민은 재빠르게 빠져나와 책상 밑의 옷가지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문이 거 의 닫힐 무렵 기사가 지갑을 들고 나왔다. 그는 언뜻 문이 닫히는 것을 본 듯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가시는 모니터에 떠올라 있는 기록을 보고는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유심히 들여다봤다. 자기가 입력했던 내용이 아니었다. 그는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봤다. "누구 거지, 이게?" 지민은 찰영실에서 뛰어나와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집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병원 밖 으로 나가 찬바람을 쐬며 서 있다가 결단을 내렸다. 위 교수가 하자는 대로 해보기로 했다. 병원 안을 바라보니 한산했다. 데스크에 한 사람 정도만 빼고 모두들 퇴근하거나 저녁을 먹으로 갔을 것이다. 저녁 시간이라 병원 입구에도 사람은 거의 없었다. 지민은 아는 사람이 없음을 확인하고 병원을 나가 정문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공중전화 박스로 갔다. 그는 수화기를 든 채로 생각에 잠겼다. 그는 카드를 넣었다. "네, 거기 위편호 교수님 댁입니까? 네, 일전에 찾아뵌 사람입니다." 한참 후에야 위 교수는 전화를 받았다. "교수님이십니까? 네, 그 일 때문입니다. 주말에요? 알겠습니다. 제가 따로 준비할 건 없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그럼 그때 뵙죠. 네." 전화를 마친 지민은 수화기를 천천히 내려놓고 전화 박스에서 나왔다. 양손을 호주머니에 넣은 채 몇 발자국 걷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둡고 힘든 얼굴 이었다. 그는 문득 고개를 들어 병원 건물을 쳐다보았다. 거대한 건물이 마치 자신을 덮쳐 오기라도 할 것 같았다. 그는 병원 안으로 걸어 들어가 아무도 없는 로비 구석의 벤치에 앉았다. 그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흐트러져 있는 상태였다. 촬영실을 뛰어 나오면서 정신없이 옷을 입은 뒤라 더욱 그랬다. 목이 답답해서 넥타이도 느슨하게 풀어놓았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동안 고민해 오던 문제의 결단을 이제서야 내렸다. 그렇다고해서 기분이 좋아지지는 않았다. 어쩌면 문제를 더 크게 확대시키게 될지도 몰랐다. 그는 갈수록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참아내기가 어려웠다. 그는 호주머니에 손을 넣다가 뭔가 잡히는 것을 끄집어 내었다. 아까 새연의 방에서 가 져왔던 담배였따. 새연을 처음 보았을 때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지금도 아마 따분해서 안달을 하고 있을 것이다. 어린 나이에 그런 벽에 걸렸다는 것 때 문에 마음이 유난히 쓰이는 게 사실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모습은 새벽 이슬을 머금은 듯 우울하고 청초해 보였다. 아픔을 안으로 안으로 쌓아 놓아서일까. 또 한가지, 그녀는 동생이 죽은 날과 생일이 같았다. 그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다른 환자와 달라 보였다. 그는 한편으로 동생의 그늘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에 게 짜증이 났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뇌리에 박혀 떠나지를 않았다. 그는 담배를 잠시 내려다보더니 한 가치를 꺼내어 입이 물어보았다. 성냥을 꺼내서 모서 리를 비비자 노란 불꽃이 일어났다. 입에 문 담배 끝에 불을 갖다 댔다. 몇 모금 빨아들이 자 노란 불이 담배 끝에 빨려들어 갔다. 그는 연기를 내뿜으면서 불을 껐다. 담배를 손가 락 사이게 끼우고서 한 모금 깊이 빨아들였다. 그리고 내뿜었다. 그는 새연이 피식 하고 웃던 모습을 상기하고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특유의 미소를 지었 다. 그러나 이내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병원으로 들어가 얼마 피 우지도 않은 담배를 쓰레기통이 비벼껐다. 그는 옷매무새를 고치고 의국으로 갔다. 의국에서는 현수와 호동이 밤참으로 김밥과 떡볶이를 먹고 있었다. 그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현수가 깜짝 놀랐다. "어, 집으로 가신 것 아니었어요?" 지민이 씨익 웃었다. "음, 볼일이 있어서 다시 왔어." 현수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 네." 호동이 입에 한가득 떡볶이를 넣은 채로 그를 불렀다. "의국장님, 이것 좀 드시죠." 지민은 거절하는 뜻으로 한 손을 들어 보였다. 그가 들어오자 시끄럽던 의국 안이 조용 해졌다. 현수가 걱정스런 눈길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지민은 책상에 앉아 흩어져 있는 서류를 정리하고 책을 펼쳤다. 이제 고통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부할 마음이 생기지도 않았 다. 힘든 하루였다. 그는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이 과장은 지수가 부탁한 책을 들고 레지던트 4년차들의 공부방에 들렀다. 텅 비어 있는 기숙사 복도의 중간쯤에서 방 문이 열리더니 레지던트 한 사람이 하품을 하 면서 나왔다. 그는 손에 수건과 치약, 칫솔을 들고 있었다. 그는 잠에서 깨 보려는 듯 고개를 좌우로 제끼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이 과장은 먼저 푯말을 확인했다. 그는 지수의 방에 이르자 노크를 했다. 안에서 대답하 는 소리가 났다. 지수는 화장기가 하나도 없는 얼굴에 머리를 위로 묶어 올리고 있었다. 그녀는 원서에 밑줄을 그어 가며 공부하고 있었는데 형광스탠드의 불빛 때문에 얼굴이 더욱 차가워 보였 다. 지수가 고개를 들고 찾아온 사람이 이 과장임을 알고는 반겨 주었다. "오셨어요?" 그는 책상으로 다가가 지수를 보고 원서를 넘겨다보더니 빙긋 웃었다. "공부는 잘되니?" 지수도 그를 마주 보며 웃었다. "잘되긴요." 그는 지수의 어깨를 툭 쳤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잘할 거라고 믿는다." "그가 책을 내밀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불편하지는 않니? 먹을 건 잘 챙겨 먹는지 모르겠구나." "그럼요. 걱정 마세요." 그가 문 쪽으로 걸어갔다. "자, 난 이제 가 보마. 할 일도 끝났으니 말이다." 지수는 일어나서 주차장까지 그를 배웅해 주었다. 그녀가 물었다. "외숙모랑 애들은 안 나와요?" "외숙모야 어차피 학교에 강의를 나가니까 나올 수 없는 거고 아이들은 모두 기숙사에 있 으니까 방학이 되면 함께 들어오겠지." "혼자서 외롭지 않으세요?" "익숙해. 그건 그렇고 넌 여유가 넘치는 거냐, 아니면 지나치게 준비성이 강한 거냐?" 그녀가 고개를 숙인 채로 씨익 웃었다. "... 존스홉킨스에서 어드미션이 왔어요." "그래? 신경외과 마취로 어플라이 했었지. 언제 가니?" "내년에 전문의 시험 합격하면 바로 떠날까 어쩔까 생각중이예요." 그가 그녀의 분명치 않은 대답을 그냥 넘기지 않고 캐물었다. "생각중이라니?" "모르겠어요." 그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왠일이냐? 네가 모르겠다는 대답을 다 하고." 그녀가 입가에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자기 차인 아카디아 앞까지 오자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 책은 스페셜리스트 프로그램 준비하기에는 별로 적합치가 않아. 다른 책들 좀 추천 해 줘?" 지수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괜찮아요." 그는 지수의 표정을 힐끗 살피고는 차에 올라타서 시동을 걸고 창문을 내렸다. 그녀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가 그녀를 불렀다. "지수야!" 지수가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안전벨트를 하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 책 받아 볼 녀석 고향이 어디니?" "네?" "강지민이... 그 친구에 대해서 알아보고 있는 중이다. 괴상한 녀석임에 틀림없어." 지수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했다. "삼촌!" 지수가 정색을 하며 부르자 그는 곧바로 차를 출발시키고 말았다. 그녀는 한방 먹은 표 정으로 멀어져 가는 차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6 다음날 지민은 아침 일찍부터 움직였다. 일정을 살핀 뒤 신경외과 회진 팀과 합류하였다. 이 과장이 제일 앞에서 뒷짐을 진 채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먼저 오새연의 병실로 갔다. 의사들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새연은 두 손으로 쪼 그린 다리를 감싸안은 채 침대에 앉아 창밖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그녀는 다가오는 사람 들을 의식한 듯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기대할 게 없다는 식의 무관심한 태도였 다. 이 과장이 되도록 밝은 얼굴로 말을 건넸다. 눈은 건네 받은 차트에 가 있었다. "좀 어때요?" 새연도 애써 방긋 웃어 주었다. "... 좋아요." 이 과장은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가서 새연의 두꺼운 차트를 한 장씩 넘겼다. 아무 도 말을 하지 않는 조용한 병실에 차트 넘기는 소리만 날카롭게 들려왔다. 새연은 멍한 눈길로 그를 쳐다보다가 그 뒤에 있는 지민과 언뜻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지난 밤 일을 생각하고는 장난기 어린 윙크를 살짝 던졌다. 지민은 갑작스런 그녀의 행동에 당황하며 주위의 눈치를 살피는데 다행히 모두들 이 과장 쪽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당황하는 그의 모습이 재미있는 듯 소리를 죽여 키득거렸 다. 이 과장이 뒤를 돌아보았다. "오새연 환자 담당이 누구지?" 지민이 한 발짝 나서며 대답했다. "접니다." 이 과장이 지민을 힐끗 쳐다보았다. 새연의 눈이 반짝였다. 이 과장이 여전히 태연한 표정으로 새연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리 앞으로 잘해 봅시다." 새연은 몸을 돌려 그 손을 잡았다. "네." 그가 문 쪽으로 가자 다른 의사들이 일제히 뒤를 따랐다. 그가 지민을 보며 말했다. "최초로 튜머가 발생한 시점부터의 병적 기록에서부터 최근에 감마나이프 했을 때까지의 데이터를 모두 챙겨봐. 아침까지 보고해." "네." 그들을 보고 있던 새연을 병실에 다시 혼자 남자 이 과장을 흉내내느라 걸걸한 목소리로 그가 한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최초로 튜머가 발생한 시점부터의 병적 기록에서부터 최근에 감마나이트 했을 때까지의 데이터를 모두 챙겨봐. 아침까지 보고해." "네." 그녀는 혼자서 피식 웃었다. 여전히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히죽거리다가 결국은 소리를 높여 깔깔거리며 웃고 말았다. 그런데 문이 열리며 지민이 다시 들어왔다. 그녀는 얼른 웃음을 멈추었다. 지민이 다가오자 태연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쪽지에 자기의 호출기 번호를 적어 주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네가 오새연 씨 담당 의사니까 급한 일이 있거나 궁금한 게 있으면 절 찾으면 됩니다. 어제 같은 경우에도 절 찾았으면 응급 조치가 더 빨랐을 겁니다. 하기야 의식불명에 나를 알지도 못했으니까... ." 그가 쪽지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새연이 그걸 달랑 들어서 보더니 말했다. "왜 이걸 절 주세요? 데스크에 간호사 언니들 있짢아요?" 그녀가 빙글거리며 지민을 쳐다보자 그가 말했다. "만약의 경우를 위해섭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는가 싶자 그가 눈길을 피하며 나가려 했다. 그녀가 당돌하고 귀엽게 말했다. "급하거나 궁금한게 있을 때만 찾아요?" 그는 무슨 말인가 싶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다시 물었다. "심심할 때 놀러오시면 안 돼요?" 그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심심할 때가 없어." 그가 다시 나가려 하자 그녀가 불러 세웠다. "아저씨." 지민이 돌아보자 새연은 침대에서 내려와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놀라 그 자리에 서 있는 그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아! 해보세요." 그녀의 말에 그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에 힘을 더욱 주어 꼭 다물었다. 그녀는 아랑곳하 지 않고 그의 입 쪽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당황한 지민 앞에서 새연은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담배 안 피우시나 보네... ." 그녀는 실망한 듯 침대로 돌아갔다. "누가 내 담배를 훔쳐갔걸랑요. 간호사 언니가 가져갔나?" 그녀는 중얼거리며 침대로 올라가더니 강아지처럼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그녀를 말없이 보고 있다가 얼굴이 약간 상기되어 나가버렸다. 문이 닫히자 그녀는 베개로 자신의 얼굴을 덮고는 힘껏 고함을 질렀다. 가운을 입은 호동과 인턴 한 사람이 한 화장실 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호동은 쌓 인 스트레스가 많은지 인상을 쓴 채로 줄기차게 연기를 뿜어 댔다. 인턴은 벽에 몸을 기대 고 서서 담배를 피웠다. 호동이 울분을 터뜨렸다. "제기랄! 울 아버지가 날 호적에 일년 늦게 올렸지. 대학에 들어올 때 한 해 재수했지. 본과 1학년 때 유급을 한 번 했으니까 그렇지 사실 강지민이 그 친구하고는 동갑이라고... ." 인턴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 "내가 이런 신세가 될 줄 알았으면 군대부터 갔다 오는 건 데... ." 호동은 담배를 뻑뻑 빨았다. "그 자식은 도대체 잠을 안 자! 조상들이 모두 자다가 죽었나봐. 그 자식이 좀 잠도 자 고 그래야 나도 눈을 붙이지. 아무튼 그 인간 완전히 괴물이라니까." 인턴이 말했다. "체력이 좋은가 보죠." 호동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야... . 체력 하면 나도 한 체력 하는 놈인데... . 그게 체력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니 라고." 인턴이 가볍게 넘겼다. "그럼 정신력이겠죠." 그는 한심하다는 눈으로 인턴을 쳐다봤다. "마! 몸이 안 따르는데 정신력이 생겨? 내가 보기엔 아무래도 보신력이야." "보신력이오? 그게 뭔데요?" "너 그 인간 밤에 한 번씩 사라지는 거 알지?" "간호사들한테 얼핏 들었어요." 호동은 눈을 게슴츠레 떴다. "아마 어디 가서 개를 한마리 뜯고 오는 거 아니면 뱀을 몇 마리 고아 먹고 오는 게 틀림 없어." "설마... ." "야, 너 그 자식 옆에 있으면 싸한 비누 냄새 비슷한 거 나는 거 알지?" 인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뱀 냄새라고... ." "뱀한테서 그런 냄새가 나요?" "아마 그럴 걸. 넌 이제 그만 나가 봐." "주무시게요?" "그럼 자야지! 나는 인간이야. 괴물이 아니라고... . 난 호모슬리피쿠스... ." "그게 뭡니까? 호모... ." "슬리피쿠스! 인간은 잠을 자는 동물이란 뜻이다. 난 잘 거니까 네가 책임지고 한 시간 만 있다가 깨우러 와! 알았어?" 인턴은 대답을 않고 우물거렸다. "빨리 안 갈래!" 인턴은 화장실을 나가 일층으로 갔다. 그가 불만스런 표정으로 투덜거리며 응급실 안으로 들어가는데 요즘 가끔 병원을 어슬렁 거리는 게 눈에 띄었던 깡마른 남자가 여전히 의사 가운을 걸치고 그의 앞을 턱하니 가로막 았다. 깡마른 남자가 물었다. "너, 어딜 그렇게 돌아다녀?" "예?" "무슨 과야?" "네, 지금은 신경외과를 돌고 있습니다." 깡마른 남자가 화난 얼굴로 말했다. "바보 같은 녀석." 인턴이 주눅이 들어 눈치를 보자 깡마른 남자가 심각한 얼굴로 누워 있는 여자를 가리키 며 말했다. "응급환자니까 빨리 뇌수술 준비해. 당장 안 하면 곧 죽을 거야." 인턴이 깡마른 남자와 신음하고 있는 여자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응급실 밖으로 뛰어나갔 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되돌아 서는 깡마른 남자의 머리에는 깊은 수술 자국이 있었다. 인턴은 화장실로 호동을 깨우러 갔다. "박 선생님! 박 선생님!" 인턴이 소리쳐 부르며 화장실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 대꾸도 없었다. 좌변기에 앉은 호동 은 침까지 흘리며 잠에 곯아떨어져 있었다. 인턴은 옆 화장실로 들어가 좌변기에 올라서서 입나팔을 만들어 소리쳤다. "박 선생님, 긴급 호출이에요!" 호동은 벌떡 일어나 뛰어가려다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박 선생님, 문을 여셔야죠!" 호동은 비척거리며 화장실을 나와 인턴을 따라 뛰었다. 신음하고 있는 환자의 이름은 최하나, 그녀는 호동이 시키는 대로 병실 구석에 앉았다. 목에 흰 천을 두르고 면도칼을 든 호동이 머리를 깎자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인턴도 착잡 한 표정으로 옆에 서 있었다. 호동은 여작 안쓰러워서 더욱 정성으로 조심스럽게 머리를 밀어 냈다. 그녀는 뭐가 그리 서러운지 복받치는 설움을 참으려고 노력해 보지만 쉽지 않아 보였다. 그디어 머리칼이 얼마 남지 않게 되자 그가 말했다. "거의 다 됐습니다. 조금만 참으세요... ." 그러자 그녀는 억지로 참고 있던 울음을 마침내 터뜨리고 말았다. 너무도 서럽게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듯 슬프게 우는 것이었다. 호동과 인턴의 표정이 숙연해졌다. 호동은 마지막 남은 머리칼을 밀고 나서 빡빡 깎인 머리를 쓰다듬듯 부드럽게 털어 주었 다. 여자는 더욱 비통하게 흑흑거리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거... 거울 좀 보여 주시겠어요?" 호동은 가운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조그만 거울을 건네 주었고 그녀는 그 속에 비친 자신 의 모습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런데 거울에 호동이 잉크가 잔뜩 묻힌 솜과 뾰족한 나 무 펜을 들고 잇는 것이 비쳤다. 그녀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 그게 뭐죠?" 호동은 매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저... 수술 부위에 표시를 해야 되거든요."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호동을 쳐다보았다. 호동은 어쩔 수 없는 문제라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녀가 울먹이며 물었다. "맹장 수술을 받을 건데 왜 머리에다 표시를 해야 해요?" 최하나 환자의 말에 호동과 잉ㄴ턴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실수를 한 것이었다. 깡 마른 남자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지시한 대로 행동하고 말았으니 보통 실수가 아니었다. 그 래도 수술실로 데려가서 마취까지 시키지는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두 사람은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난감해서 쩔쩔 맸다. 인턴이 호동의 허리를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보세요. 외과 의사들이 오고 있어요. 빨리 튑시다. 빨리요!" 호동이 당황해서 두리번거렸다. "어디? 어디?" 인턴은 다급해져서 호동의 팔을 끌어당겨 빠른 걸음으로 응급실을 벗어나려 했다. 그때였다. 의사들에게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그녀가 그들을 향해 비명을 지르는 게 들렸다. 지민은 심각한 얼굴로 데스크의 책상에 앉아 있었다. 그는 두꺼운 차트 뭉치를 뒤적이고 있었다. 차트 상단에는 오새연-나이:16세(F)라고 쓰여 있었다. 그는 영어로 쓰여진 새연의 과거 병 기록을 읽어내려 가고 있었다. 그의 귀에 간호사실의 연린 문틈 사이로 간호사들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 간호사가 말했다. "... 소아과에 민 간호사가 걔 그전에 수술했던 병원에 있었대." 다른 간호사가 말했다. "그래?" "그때만 해도 친척들이 밤낮 찾아와서 그렇게 괴롭혔대." "왜?" 그 소리에 지민의 얼굴이 매우 불길한 그림자가 스쳤다. "왜는... 걔가 유산으로 받은 돈이 꽤 되니깐 그거 차지하려고 그러는 거지. 걔가 민 간호 사한테 그러더래. 자기가 부자집에 안 태어났어야 수술도 못 하고 편하게 죽었을 거라고... . 엄마 죽이고 태어난 것도 싫고 친척들이 돈 때문에 자기한테 잘하는 것도 싫어서 죽기 전에 돈 다 써 버리고 죽을 거라고... ." "그래서 특실에 입원한 거래?" "야, 야. 돈있는 얘들한테 특실 입원료가 얼마나 되겠어?" "그럼 돈이 그렇게 많대?" "왜? 관심 있어? 그럼 한번 잘해 줘 봐. 혹시 알아? 감동해서 나중에 한몫 안겨 주고 죽을지?" 그 말을 들은 상대방 간호사가 장난을 치는지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얘는!" "아야!" 이야기를 들은 지민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죽음을 생각할 만큼 위독한 어린 소녀가 외롭기까지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친구들과 몰래 어울려 놀다가 의식을 잃고 쓰러져 실려 왔던 그녀의 창백한 얼굴이 생각났다. 다른 환자들은 보호자라도 옆에 붙어 있는데 그녀는 늘 혼자였다. 새삼스럽게 그날 자신이 너무 심하게 말한 건 아닌지 후회가 되었다. 그래도 나중에 큰 일을 내기 전에 알아듣게 경고를 해 두는게 났다고 생각했다. 그는 책상 앞의 책꽂이에 꽂혀 잇는 최신 저널지를 꺼내어 목록을 찾기 시작했다. 그는 무척이나 진지했다. 한 권을 뽑아 들고 안쪽을 펼치자 최신 수술방법에 관한 연구 논문이 그림과 함께 실려 있었다. 그는 다시 새연의 병적 기록 차트를 뒤지기 시작했다. 이때 데스크 안으로 현수가 들어왔다. 손에는 MRI 사진이 담긴 큰 봉투를 쥐고 있었다. 그가 지민에게 다가와 말했다. "오새연 환자 MRI사진이 나왔습니다." 지민은 현수와 함께 의국으로 들어갔다. 옆으로 길다란 형광판에 불을 켜고 사진을 걸었다. 새연의 두 개골 단층촬영 사진과 뇌 혈관 X-ray 사진들을 걸었다. 두 사람은 심각하게 사진을 들어야보았다. 지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처음으로 감마나이프 처지를 한 게 5년 전이었는데 1년 반 뒤에 더 큰 놈이 생겼어." "감마나이프로 처리했을 경우에 보통 재발하려면 2년 이상 걸리지 않습니까?" 지민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보통은 그러는데 이 환자의 종양은 번식이 아주 빠른 편이야. 이대로 두면 정상적인 뇌 조직까지 다 파먹고 말겠는데... ." 현수가 말했다. "거의 정상적인 생활을 할 기회가 없겠는데요. 이번에 수술하면 네 번째인데 가망이 있 을까요?" 지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의학적으로 보면 없어... . 머리 속에서 이런 녀석들이 자라고 잇는데 환자는 상태가 무 척 좋은 편이다. 시야가 좁아지지도 않았고. 최초에 찍었던 사진부터 차례로 걸어 보지." "예." MRI 단층 사진들의 중앙 부위에 백색 무늬로 새겨진 모양이 보였다. 그것은 마치 사람 이 춤을 추고 있는 듯했다. 새연은 살며시 조그많고 예쁜 상자의 뚜껑을 열어 보았다. 뚜껑의 안쪽에 부모님의 빛바 랜 사진과 함께 자신의 돌사진도 붙어 있었다. 그녀는 잠시 부모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가냘픈 어머니의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 그녀는 눈을 감아 아픈 마음들을 떨치려 했다. 그리고 상자 안으로 눈길을 돌렸다. 상자 안에는 손도 별로 댄 적이 없는 립스틱과 컴팩트, 향수 등 여러가지 조그맣고 예쁜 화장품들이 가지런히 정리가 되어 있었다. 한 쪽 구석에는 귀걸이와 목걸이 몇 쌍이 예쁜 색깔의 머리 리본과 함께 놓여 있었다. 화장품과 장식품 하나하나가 모두 최고급의 것들이 었다. 새연은 립스틱 하나를 꺼내어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조심스레 손등에 발라 보았다. 그 러자 자신이 좀 생겼는지 옆으로 돌아 거울 속의 자기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얼굴이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에 아이보리색으로 물들어 보였다. 새연은 조심스럽게 립스틱을 입술에 가져가 천천히 발라 보았다. 위아래 입술을 겹쳐 문 지르면서 요리조리 살펴보고는 쑥스러워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손도 대지 않던 것들인데 갑자기 흥미가 생겨 난 것이다. 그녀는 마스카라나 향수의 뚜껑들을 하나씩 열어 보았다. 선물 받은 것도 있고 친구들과 몰래 시내에 나갔다가 사 온 것도 있었다. 시내에 한 번씩 나가면 부러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예쁜 옷을 입고 마음씩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고, 맛있는 음식도 마음대로 먹고, 영화도 보고, 랄 카페를 가기도 하고, 노래 방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그녀도 친구들과 한 번씩은 해보았지만 자유롭게 할 수는 없었다. 지난밤에 갔을 때도 제대로 놀아 보지도 못하고 쓰려졌지 않은가. 사실 그런 곳에 가더 라도 그녀는 다른 친구들처럼 익숙치 않아서 뀌다 놓은 보릿자루가 되기 십상이었다. 그녀는 멍하니 창 밖을 보다가 물건들을 한 쪽으로 치워 놓고 침대 밑으로 내려섰다. 병걸이에서 링거 병을 빼 내어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나온 그녀는 그대로 멈추어 서고 말 았다. 의사 가운을 걸친 깡마른 남자가 시퍼런 메스로 자신의 머리칼을 끊어 내며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얼어붙은 듯 그대로 서 있었다. 그 남자의 얼굴에 광기가 넘쳐 흐르고 있었다. 그때였다. 경비원이 문을 열더니 소리쳤다. "어이, 이봐! 거기서 뭐하는 거야." 깡마른 남자의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던 간호사가 그가 특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경비 원을 부른 것이었다. 남자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서 경비원을 쳐다보았다. 그는 메스를 내보이며 달려들 태 세를 취했다. "가까이 오지 마!" 이 광경을 본 화이트 가운 한 사람이 용기있게 그 남자에게 다가가 설득을 하려고 막 입 을 열려는 참이었다. 그는 입도 열기 전에 허망하게도 깡마른 남자의 주먹을 얼굴 정면에 맞고 나가떨어졌다. 그러자 경비원도 한 발 뒤로 주춤 물러났다. 깡마른 남자는 겁이 나서 꼼짝도 못하고 있는 새연을 붙잡고 메스를 목에 들이댔다. "모두들 다가오지 마! 내 말 안 들으면 이 여자 목숨은 끝이야!" 새연은 부들부들 떨렸지만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몸이 굳어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가 없었다. 근처에 있던 화이트 가운 두 사람과 간호사, 몇몇 환자들도 몰려들었다. 사람들이 뛰어가는 소란한 소리는 신경외과 의국에도 들렸다. 지민이 인상을 쓰며 현수에게 말했다. "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와. 환자가 말썽을 일으켰나 보지?" "예." 현수는 문을 열고 소리나는 방향을 살펴보더니 사태가 좀 심각한 것을 느끼고 뛰어가 보 았다. 현수가 그곳까지 갔을 때는 정신병동에서 깡마른 남자를 찾으러 나온 레지던트가 그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그러나 깡마른 남자는 그를 보자 더욱 발악하듯 소리를 질렀다. "오지 말라고 경고한 소리 못 들었어!" 깡마른 남자는 메스로 새연의 목을 눌렀다. 메스의 날카로운 끝이 금방이라도 그녀의 투 명한 살갗을 파고 들어 피가 흘러나올 것 같았다. 현수는 의국으로 되돌아갔다. 그는 문을 와락 열며 고함치듯 소리쳤다. "강 선생님!" 사진 속의 종양을 주시하며 착잡해 있던 지민이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무슨 일이래?" "지금 정신병 환자가 오새연 환자에게 칼을 들이대고 있습니다!" "뭐야!" 지민은 잔뜩 긴장해서 문을 박차고 나가 뛰다시피 새연의 병실로 향했다. 그 뒤를 현수 가 따라가며 말했다. "교통사고로 뇌수술을 받은 후에 12병동에 있던 환자랍니다." "누구 다친 사람은 없어?" "화이트 가운 한 사람이 코뼈가 나갔습니다." 해연의 병실 앞에 열댓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잇는 것이 보였다. 지민의 얼굴이 일그러졌 다. 지민이 사람들 사이로 뚫고 병실로 들어갔다. 화이트 가운 두 사람과 경비원이 바로 그 남자의 앞에 서서 여자를 풀어 주라고 고함치듯 달래고 있었다. 깡마른 남자는 눈이 충혈된 채 팔뚝으로 새연의 턱 아래를 뒤에서 감싸안고 다른 한 손으 로 메스를 새연의 목에 바짝 들이대고 있었다. 그는 광기가 올라 거품을 튀기며 말했다. "가까이 오지 마! 가서 병원장을 데려와! 그 자식하고 단판을 지어야겠어! 그 자식 이외에 누구라도 다가오면 이걸로 이 여자 목을 쑤셔 버릴 테다!" 지민은 덫에 걸린 새처럼 파르르 떨고 잇는 새연을 보았다. 가냘프지만 나름대로 침착하 려고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의 눈에 경련이 일어났다. 지민이 화이트 가운들과 경비에게 차갑고 강한 말투로 요구했다. "나가세요." 그들은 지민을 쳐다보았다. 지민은 알아서 할 테니 나가라는 뜻으로 문을 향해 턱짓을 했다. 그러나 그들은 빨리 나가지 않고 우물거렸다. 지민이 다시 한 번 강하게 쏘아붙였다. "내 환잡니다. 나가요, 어서!" 그제서야 그들은 슬금슬금 분 밖으로 나갔다. 그들이 나가고 나자 지민은 문을 아예 잠가 버렸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돌려 남자를 마 주 보고 섰다. 그때 지수가 누군가에게서 얘기를 들었는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소란이 일 어났다는 병실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그녀는 당황한 얼굴로 현수에게 물었다. "강지민 선생은 어디 있어요?" "지금 저 안에 계세요." "혼자서요?" "정신병동 환자가 이 방 환자의 목에 메스를 들이대고 있습니다." 지수가 놀라며 물었다 "누구죠? 이방 환자가?" "19세 된 여잔데... G.M 환자입니다." 그녀는 걱정스럽게 문을 쳐다보았다. 한편 병실 안의 지민은 깡마른 남자의 눈을 응시한 채로 천천히 그를 마주 볼 수 있는 벽 으로 옮겨 가서 등을 기대고 섰다. 새연의 팔에 연결된 링거 병이 바닥에 나뒹굴고 피가 조금 역류해 있었다. 남자는 지민을 쳐다보며 눈을 부라렸다. 그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우헤헤헤! 이제 알겠구먼! 네놈이 바로 나를 수술해서 보험금을 타먹자고 꼬드긴 놈이 구나!" 지민은 호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말없이 그 남자의 눈만 쳐다보았다. 새연의 얼굴은 갈 수록 창백해졌다. 남자는 그녀의 목에 메스를 더욱 바짝 갖다 대며 소리쳤다. "너희들이 어차피 날 죽일 거라는 거 알아! 그런데 난 죽어서 천당엘 가야 하는데 길눈 이 어두워서 말이야. 그래서 이 아이랑 같이 갈 생각이야." 지민의 미간에 주름살이 생겨 났다. 남자는 눈에 더욱 광기를 띠더니 새연의 팔에 연결 된 링거 선을 메스로 잘라 버리고 링거 병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선에서 뿜어져 나간 피 가 남자의 얼굴에 튀었다. 그녀의 팔에서도 피가 역류하여 하얀 침대보를 적셨다. 남자가 눈에 살기를 보이며 링거 병을 들어 지민을 겨냥했다. 그러나 지민은 꿈쩍도 않고 남자의 눈만을 응시했다. 남자는 소리를 치며 링거 병을 던졌다. "죽어!" 링거 병이 피하지 않는 지민의 머리에 명중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병이 깨져 산산조각이 나서 흩어졌다. 새연은 자신의 위험을 잊고 지민을 살폈다. 그의 이마가 찢어져 피가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여전히 남자의 눈에 박혀 있을 뿐이었다. 갑자기 지민의 눈동자가 확 줄어들었다. 그러자 깡마른 남자는 움찔했다. 지민이 눈에 더욱 힘을 주었다. 남자는 차츰 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고 묘하게도 커진 그의 동공 또한 지민의 눈에 고정되 고 말았다. 남자의 동공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작아지기 시작했다. 지민의 눈동자가 천천히 정상적인 크기로 돌아가면서 새연의 목을 감고 있던 남자의 팔이 나 메스를 들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동공도 원래의 크기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남자의 손이 덜덜 떨리는 듯하더니 마침내 메스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는 뭔가에 홀린 듯 팔을 축 늘어뜨리고 문으로 다가갔다. 스스로 문을 열고 밖으로 걸 어 나갔다. 얼이 빠진 모습이었다. 난동을 피우던 사람이 얌전히 나오자 잠시 멍하게 바라 보고 있던 화이트 가운들이 곧 달려들어 그의 팔을 양쪽에서 붙잡았다. 지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새연이 지민의 가슴에 안겨서 울음을 터뜨 리고 있었다. 무서움과 긴장이 풀린 탓에 울음이 나온 것이었다. 들썩이는 새연의 어깨를 다독여 주던 지민은 지수와 눈이 마주쳤다. 지민은 새연을 달래 침대 쪽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간호사를 불렀다. 지민은 아직도 피가 흐르는 주사 바늘과 링거 선을 떼어 냈다. 그는 달려온 간호사에게 지시했다. "여기 침대보를 갈아 주고 링거 주사도 다시 놓으세요." "네, 알겠습니다." 다른 간호사와 경비는 깨져 흩어져 있는 링거 병 조각을 치웠다. 간호사가 침대보를 가져와 갈아 주자 지민은 새연을 안아 침대에 눕혀 주었다. 그리고 타이르듯 말했다. "놀랐겠지만 이제는 안심하고 한숨 푹 자요." 새연은 말 잘 듣는 어린아이처럼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민은 이불을 끌어 올려 그녀를 덮어 주고는 뒤로 돌아섰다. 그러자 지수가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잡아끌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데스크로 가서 간호사실로 들어갔다. 간호사들이 새연의 병실에 모두 몰려가 있 어서 그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지민을 밀치듯 의자에 앉혔다. 지수는 걱정을 하는 건지 짜증을 내는 건지 그에게 따지듯 말했다. "너 그러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제발 몸 좀 사릴 줄도 알아라!" 지민이 싱긋 웃었다. 그가 웃는 모습을 본 그녀가 쏘아붙였다. "넌 지금 웃음이 나오니?" 지민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 "너 지금 내 상처 봐주려고 이리로 데려온 것 아냐? 피가 눈으로 흘러내려서 앞을 못 보 겠는데?" 지수는 그를 한 번 노려보고는 약상자를 가지러 갔다. 피를 닦아 내고 약을 바른 후 반창고를 붙여 주었다. 다 끝났다 싶자 지민이 일어났다. 그가 뭔가 말하려는데 그녀가 틈을 주지 않고 잡아 끌었다. 지민이 끌려가지 않으려고 팔을 빼면서 물었다. "또 어딜 가려고?" "잔말 말고 따라와! 넌 내가 아니면 하루종일 굶을 인간이야.: 지민이 피식 웃었다. 지수는 그를 끌고 식당으로 가서 식권 두 장을 사왔다. 두 사람은 쟁반에 백반을 담아 들고 테이블로 가서 앉았다. 지수가 막 수저를 드려는데 산부인과 의사인 경철이 후배와 함께 식당으로 들어오더니 지수 쪽으로 다가왔다. "닥터 표!" 그는 지민에게도 호들갑스럽게 아는 척을 했다. "어, 강 선생도 있었구나?" 지수는 인상을 찌푸리면서 무슨 할 말이 있느냐는 투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경철은 좋은 일이 있는지 연신 싱글거렸다. "너 아직 너희 과장님한테 말씀 못 들었나 보구나." "뭘?" 경철은 비꼬는 투로 말했다. "내가 지난번에 부탁했던 환자 있지? 수술 스케줄이 잡혔을 거야. 우리 과장님이 너희 과장님한테 직접 말씀하신 걸로 아는데... ." 지수는 관심없다는 듯 수저를 다시 들었다. 경철은 가던 길을 돌아서서 그녀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근데 시간이 자정인가로 잡혔을 걸. 퇴근 늦게 하게 만들어서 미안하다. 한번 체크해 봐!" 지수는 야무진 입술을 꼭 다문 채 가만히 있더니 갑자기 아구아구 먹기 시작했다. 지민이 그녀를 보고 있다가 한마디했다. "너 또 성질 부렸구나?" 지수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성질을 부리긴! 안 된는 걸 안 된다고 했을 뿐이지." 지민은 그런 지수를 보자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제서야 이마의 상처가 욱신 거렸다. 7 새연은 긴장이 풀린 탓에 쥐죽은 듯이 잠에 빠져들었다. 그녀는 암흑 속을 헤매고 있었 다. 그곳에 갑자기 지민이 나타났다. 그는 온통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는 슬픈 눈 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새연은 멀어져 가는 지민 을 있는 힘껏 쫓아가며 외쳤다. "아저씨, 가지 마세요!" 그는 울부짖는 새연의 외침을 못 들었는지 점점 사라져 갔다. 그녀는 아무리 쫓아가도 제자리 걸음을 하는 듯했고 지민은 벌써 저만치 멀어져 가고 있었다. "아저씨, 아저씨!" 새연은 애타게 그를 부르다가 깨어났다. 몸은 땀으로 흥건했다. 꽤 잤는지 창 밖은 어둠 으로 뒤덮여 있었다. 꽤 잤는지 창 밖은 어둠으로 뒤덮여 있었다. 병실 안도 침대 머리맡 의 작은 형광등만 켜져 있어서 어두웠다. 낮은 서랍장 위에 저녁 식사가 담겨진 쟁반이 놓여 있었다. 누가 들어온지도 모르고 잤 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밥그릇에 손을 대 보았다. 차디차게 식어 있어서 그렇잖아도 입맛 이 없는데 더욱 먹기가 싫어졌다. 새연은 지민을 생각했다. 누군가 자신을 위해 몸을 던져 준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제껏 그 누구도 없었다. 같은 피를 나눈 친척들은 오히려 그녀의 죽음을 바라고 있었다. 그녀에게 서 뭔가 빼앗아 갈게 없나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이미 다 보았던 만화책을 꺼내어 펼쳤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모든 그림이 지민의 얼굴로 보였다. 그녀는 만화책을 덮어 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꺼내 캔째로 들이켰다. 그래도 목마름은 가라앉지 않았다. 그가 궁금했다. 이마를 다쳐서 갔는데 치료는 했는지.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 . 그녀 는 다음날 아침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어차피 회진을 하면 담당의인 그가 안 올리가 없으 니 말이다. 그러나 그녀는 금세 결심을 바꾸고 한쪽 구석에 세워 놓은 휠체어를 타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늘 본 데스크의 간호사들이 눈으로 아는 체를 하더니 한 마디씩 했다. "좀 괜찮아요?" "놀랬었죠?" "얼굴이 아직도 창백하네?" 그녀는 억지로 웃으면서 괜히 복도 끝까지 갔다. 다시 되돌아오면서 신경외과 의국 앞에 서 멈추어 섰다. 무슨 소리가 들리지는 않나 귀를 기울여 보았다. 그때 문이 열렸다. 화들짝 놀란 새연은 병실 쪽으로 가면서 뒤를 돌아 보았다. 지민이 아니었다. 그녀는 병 실로 되돌아갔다. 아무래도 퇴근을 했을 것이다. 그녀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침대로 기어 들어갔다. 눈을 감고 다시 잠을 청해 보았다. 온 몸이 아직 움직이기도 버거웠지만 잠은 다시 오지 않았다. 자는 둥 마는 둥 하던 그녀가 동이 트기 시작하자 부리나케 일어났다. 그녀는 옷장을 열고 긴 머리칼의 가발을 찾아냈다. 쓰고 있던 커트머리 가발을 벗고 그 것으로 바꾸었다. 가발을 머리에 쓰고 거울을 보면서 빡빡 깎았다가 보기 싫게 자란 머리 칼이 바깥으로 보이지 않도록 손가락으로 잡아내렸다. 구김이 간 환자복도 손으로 잘 펴서 옷매무새를 단정히 했다. 나름대로 준비를 마친 그녀는 휠체어를 탄 채로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다녔다. 복도로, 의 국으로, 식당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응급실로 가 보았다. 응급실에서는 수 많은 환자에 몇몇 의사들이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지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막 돌아서려는 그녀의 눈에 현수와 출구 쪽으로 걸어나오 는 그가 보였다. 그녀는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지민이 문을 나서려 하자 새연은 얼른 코너에 들어가 몰래 숨었다. 그녀는 현수와 의학 용어를 주고받으며 이야기 하는 그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그는 그녀가 숨어 있는 쪽을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갔다. 그녀는 그들이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을 확인하고 그 옆의 엘 리베이터에 자신도 탔다. 그들은 분명 신경외과와 새연의 병실이 있는 7층에서 내릴 것이다. 그녀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두리번거리며 복도를 지나갔다. 데스크 쪽을 지날 때쯤 두 런거리는 소리가 들려 그쪽을 보았더니 안쪽에서 지민이 다른 의사들과 환자의 차트를 보아 가며 컨퍼런스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휠체어를 탄 채 왔다갔다 하며 그를 훔쳐 보았다. 지민은 그런 새연을 눈치챘지만 모른 척하고 대화에만 열중했다. 새연은 그를 보려고 애 쓰다가 마주 보이는 쪽에 서 있던 호동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호동이 씨익 웃어 주자 그녀는 깜짝 놀라 자기 병실 쪽으로 가 버렸다. 나쁜 짓 하다가 들킨 것처럼 떨리고 얼굴 까지 빨개졌다. 병실 안으로 들어온 그녀는 거울을 다시 한 번 보고는 침대 위로 올라갔다. 이제 곧 회 진 시간이기 때문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얼른 누워 눈을 감았 다. 사람들이 들어오고 소리가 나고 이 과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새연 씨?" 새연이 눈을 떴다. "네, 안녕하세요?" "오늘은 좀 어떠세요? 어제 일로 놀랐을 텐데 진정은 좀 됐어요?" "네... ." 새연은 대답을 하면서도 지민을 흘낏거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가까운 데서 보니 그의 이 마에는 생각외로 작은 상처가 보일 뿐이었다. 이 과장은 다른 의사들과 한참 동안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지민은 자신을 보느라 여념이 없는 그녀를 짐짓 모른 체했다. 그녀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지민이 다른 의사들과 나가 버리자 허탈하고 짜증이 났다. 그녀는 그대로 누워 눈만 깜박거리다가 일어났다. 다시 휠체어를 타고 밖으로 나갔다. 의사들이 회진 도는 것을 먼 발치에서 보고 있었다. 회진이 끝났는지 그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지고 말았다. 그녀는 그후로는 지민을 찾을 수가 없었다. 병원 건물을 온통 뒤지다가 데스크로 가서 물어 보기로 했다. "언니, 저 강 선생님께 말씀 드릴 게 있는데 어디 계세요?" "지금 수술 들어가셨을 텐데요?" "그래요? 고맙습니다." 새연은 수술실로 갔다. 그 앞을 오가며 수술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기다리다 못해 자판 기에서 커피를 한잔 뽑았다. 그것을 홀짝홀짝 다 마셨는데도 그가 나올 기미는 보이지 않 았다.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았다. 벌써 세 시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그녀는 따분해서 종이컵의 끝을 접었다 폈다 하다 가는 기지개를 켰다. 그 순간 수술실의 자동문이 열리며 말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벽쪽에 몸을 바짝 붙였다. 지민이 나오고 그 뒤를 호동이 따르고 있었다. 지민은 이번에도 새연을 무심히 지나쳤다. 그의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그녀는 이번엔 약이 올라 참지를 못하고 종이컵을 구겨서 지민의 머리를 향해 힘껏 던졌다. 그리 고 재빨리 숨었다. 그러나 머리를 정통으로 얻어맞은 사람은 호동이었다. 호동이 뒤를 돌아보면서 누가 던졌나 눈을 부릅떴다. 새연은 호동과 눈이 마주치자 깜짝 노랄 뒤돌아 뛰어가려는데 누군가와 부딪치고 말았다. 차가운 표정을 한 지수였다. 두 사람은 그대로 서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지수는 아무 말도 않고 새연을 불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새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합니다. 제가 그만... ." 지수는 대꾸도 않고 고개만 약간 숙여 주고는 지민이 가는 방향과 같은 쪽으로 걸어갔다. 지민은 그 광경을 보고 있다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새연이 이쪽을 돌아보 자 얼른 얼굴을 굳히고 돌아섰다. 지수가 그를 따라잡았다. "저 여자 환자 자주 보인다." 지민은 그저 웃기만 하고 호동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호동은 의국으로 갔다. 여전히 얼굴은 심각해 보였다. 소파에 앉아 몸을 뒤로 제끼고 앉 았다. 그때 위이잉 하는 소리와 함께 파리가 날아다니는 것이 보였다. 호동의 눈이 파리의 움 직임을 따라 연신 움직였다. 파리가 옆에 앉아 잇는 인턴의 어굴 주위를 돌다가 테이블 위 로 날아가더니 거기에 앉았다. 호동과 인턴이 눈이 동시에 그쪽을 향했고 인턴이 말없이 호동을 쳐다보았다. 호동은 충전시켜서 쓰는 조그만 자동청소기를 들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청소기를 테이블 에 갖다 붙이더니 차츰 파리와의 거리를 좁혀 갔다. 인턴이 침을 꼴깍 삼켰다. 드디어 호동이 버튼을 누르자 청소기가 작동되면서 바람소리 와 함께 파리가 그 속으로 쏙 빨려들어가고 말았다. 인턴이 만족스러워하고 잇는 호동을 감탄의 눈길로 보았다. "햐! 정말 대단하십니다!" 호동은 별거 아니라는 겸손한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그에게 물었다. "너, 그거 아냐?" "뭘요?" "아무래도 특실에 입원한 여자애가 날 좋아하는 것 같아." "G.M 환자 말이에요?" 호동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응... . 참, 나... . 환자하고 썸씽 생기면 곤란한데." 인턴이 그럴 리가 있겠느냐는 듯이 말했다. "설마 그러겠어요? 아니면... 원래 좀 지저분한 사람을 좋아하나 보죠?" 호동이 눈을 부라렸다. "이 짜식이!" 인턴이 팔을 올려 머리를 막는데 노크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얼른 자세를 고쳐 앉았 다. "네." 문이 열리자 지수가 이 과장이 갖다주었던 두꺼운 책을 들고 나타났다. 호동과 인턴이 가볍게 목례를 했다. 지수가 안을 둘러보며 물었다. "다들 어디 갔어요?" 호동이 그걸 모르냐는 투로 말했다. "추계학회 가셨잖아요." 지수는 그제서야 생각난다는 듯 말했다. "아, 참! NS 학회가 있었지. 근데 강 선생님은요? 이곳에 있는 줄 알고 왔는데... ." 호동이 담배를 피워 물었다. "아마 과장님 대신 외래환자 보러 가셨을 거예요. 이제 곧 올라 오실 시간인데요." "여기서 좀 기다려도 될까요?" "그... 그러시죠, 뭐." 지수는 제일 안쪽 구석에 있는 의국장 지민의 책상 쪽으로 갔다. 호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책상과 책꽂이를 둘러보았다. 그녀는 가지고 온 책을 책상 위에 놓더니 그 옆에서 포 스트잇을 가져다가 책 위에 붙이고 펜으로 뭔가를 쓰기 시작했다. "필요할 것 같아서 구했어. 생일 축하한다. Pyo" 몸을 일으켜 세우는 지수의 눈에 오새연의 두꺼운 차트가 들어왔다. 호동 쪽을 살펴보니 그들은 파리 잡는 법을 이야기하며 키득거리고 있었다. 지수는 새연의 차트를 넘겨 봤다. 수년 전부터 다른 병원에서 기록해 온 차트였다. 심각하게 몇 장 넘겨 보던 지수가 손을 멈추었다. 차트의 한 구석에 조그만 나비 한 마 리가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얼굴이 굳어졌다. 학생 시절, 그때도 지민이 그려 놓은 나비를 본 적이 있었다. 시험 기간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지수는 복사할 자료를 가지고 복사실로 갔다. 문을 열 어 보니 같은 과 학생이 노트 복사한 것을 챙기고 있었다. 지수가 말을 걸었다. "바쁘시구먼, 기말시험 기간이 돼 가니까." 그가 불평하는 투로 말했다. "천사응 교수 수업은 도저히 필기를 할 수가 없어. 무슨 말이 그렇게 빠른지... ." 지수가 노트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럼 이건 누구 노트니?" 그는 복사한 종이를 한 장 한 장 챙기면서 대답했다. "지민이." 지수는 그가 챙기는 복사 종이를 슬쩍 보다가 그 중 한 장의 귀퉁이에 조그만 나비가 그 려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지수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 이거 지민이 거 맞니?" "응... ." 그가 저런 낙서를 했다고 생각하니 어울리지 않을 뿐더러 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몇 년이 지난 지금 그 나비 그림을 또 본 것이다. 나비가 그에게 어떤 의미를 지 니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턱을 괴고 앉아 있다가 아무래도 그가 금방 올 것 같지 않아 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의국을 나가 신경외과 외래로 갔다. 간호사들이 이것저것 차트를 챙기며 외래를 마감하고 있었다. 지수가 그들에게 물었다. "혹시 강지민 선생 여기 없어요?" 최 간호사가 대답했다. "응급실 내려가셨어요." 지수는 나가면서 인사했다. "수고해요." 그때 최 간호사가 생각나는 게 있는지 그녀를 불렀다. "아 참, 선생님!" 지수가 되돌아서자 그녀는 자기의 책상 서랍에서 소포인 듯한 봉투를 꺼내더니 그 안에서 영어로 쓰여진 편지를 그녀에게 주었다. "지난번에 과장님이 미국으로 부탁하신 건데요. 절더러 책상 서랍에 넣어두라고 하시고 선 잠가 놓고 가셨지 뭐예요. 이걸 받자마자 미국에서 전화가 두 번이나 왔는데 제가 뭐 내용을 알아야죠. 과장님이 다른 사람한테 주지 말라고 특별히 말씀하셨는데 선생님이 한 번 읽어 보시고 급한 일이면 연락 좀 취해 주시겠어요? 삼촌이시잖아요?" 지수는 무심결에 편지를 받아 읽어 보았다. 그것을 읽어내려 가던 지수의 얼굴이 점점 심각하게 변했다. 지수는 태연하게 얼굴빛을 바꾸고 말했다. "비디오 테입도 있죠?" 최 간호사가 봉투를 들어 보였다. "여기... ." "그것도 제가 보관하고 있을게요." "그런데 이건... ." 지수가 별거 아니라는 듯 웃었다. "괜찮아요. 제가 삼촌한테 말씀 드릴게요." 최 간호사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봉투를 건네 주었다. 지수는 손에 봉투를 들고 얼굴이 굳어진 채 급한 걸음으로 복도를 걸어갔다. 그녀는 뭔 가 큰일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표정으로 걸어가다가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나이가 지긋한 의 사를 보더니 그쪽으로 다가갔다. 지수가 가볍게 목례를 했다. "과장님, 안녕하세요?" 그가 반가워 했다. "어? 지수구나. 올해 시험이지? 공부는 잘돼?" 지수는 그의 옆에 붙어 걸어가며 말했다. "저... 좀 여쭤 볼 게 있는데요." "뭔데?" "흉부외과 수술할 때도 CCTV로 녹화를 뜨나요?" "CCTV? 아니." "그럼 혹시 수술실 천장에 비디오 카메라 같은 것 없나요?" 그는 뭔가를 좀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 "가만 있어 보자. 그래 맞다. 지난번에 우리 병원 증축할 때 미국식으로 강의실이나 과 장실에서 수술 장면을 볼 수 있도록 한다고 케이블을 깐다든가 카메라를 설치한다든가 했던 적이 있어. 그런데 별루 뭐... 아직 우리 병원에선 사용을 안 할 텐데... ." "그럼 수술 장면을 찍으려고 마음만 먹으면 찍을 수 있겠군요." "아마... 가능하겠지. 그런데 그건 왜?" 지수가 웃어 보였다. "제가 후배들 오리엔테이션 시키는 데 좀 필요할 것 같아서요. 고맙습니다, 과장님." 그가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려는 그녀에게 한 쪽 손을 들었다. "그래, 가끔 들러." "네." 그가 저만치 까지 걸어가는 걸 보고 있던 지수는 다시금 당황한 표정이 되어 엘리베이터 쪽으로 뛰어갔다. 마취과 의국으로 갔다. 지수는 먼저 문을 열고 들어가 누가 있는지 확인해 보았다. 그녀 의 짐작대로 아무도 없었다. 지금 다른 사람들은 수술실에 잇을 시간이었던 것이다. 지수는 봉투에서 테입을 꺼내어 비디오에 넣고는 플레이를 눌렀다. 화면에서 컬러 바가 나오자 FF버튼을 눌렀다. 화면이 빨리 돌아가면서 수술장면이 나오자 버튼에서 손을 뗐다. 모니터 화면은 수술실을 천장 모서리에서 잡은 것으로 수술실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화질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수술대 위에 누워 있는 환자가 지난번 지민이 기적적으로 살 려 놓은 아이라는 것은 알아볼 수 있었다. 수술실 사람들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이의 머리맡에서 집도를 하고 있는 사람 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강지민이라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그위 손 주위로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한 모니터 사이즈 배율의 조그만 네모가 나타났다. 지수는 그 네모 속을 주시했다. 지민 옆에 서 있던 의사 한 사람이 수술할 때 쓰는 현미경용 모니터를 가지러 구석으로 갔다. 그리고 지민 옆의 간호사가 마취과 의사와 뭐라고 이야기를 주고받는 순간 지민의 손이 아이의 머리를 감쌌다. 그리고 아이의 머리와 지민의 손 사이에서 뭔가가 보이는 듯 싶었는데 너무 거리가 멀어서 구분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지수는 긴장한 채 다시 FF 버튼을 누르자 고금 지나서 네모로 구분해 놓았던 곳이 클로 즈업 되어 화면 가득히 보였다. 지수는 안경을 고쳐 썼다. 화면에서 지민의 손이 아이의 두개골에 닿자 그 사이에서 뭔 가 엷고 푸른 빛이 보일 듯 말 듯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를 보고 있던 지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아연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8 지민은 의국에 앉아 지수가 준 책을 보고 있었다. 벽시계가 막 12시를 넘기고 있었다. 그는 뭔가 걱정이 잔뜩 잇는 사람처럼 지수가 써 놓은 쪽지를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그 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호출기가 울렸다. 지민은 전화기를 들어 음성 메시지를 확인했다. 전화기를 들고 있는 그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하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의국을 나갔다. 코너를 돌아 병실에 막 들어선 지민의 눈에 뜻밖에도 새연이 어두운 방의 창가에서 뒤돌 아 서 있는게 보였다. 무엇을 들고 있는지 노란 빛이 창에 반사되고 있었다. 그는 무슨 일 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제법 가까이 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녀 는 여전히 돌아서 있었다. 그가 어깨에 막 손을 얹으려 하자 그녀가 돌아섰다. 그녀는 활짝 웃는 얼굴로 촛불을 하 나 꽂아 놓은 초코파이를 들고 있었다. 다소 어색해하기는 했지만 귀엽게 생글거렸다. "짠! 선생님, 생일 축하해요. 간호사 언니한테 여쭤 봤어요. 제가 제일 먼저 축하해 드 리려구요." 지민이 좀 당황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끄세요, 촛불." 노란색 불꽃이 반사되어 그녀의 얼굴은 더욱 따뜻하고 귀여워 보였다. 지민은 딱딱하게 말했다. "아프다고 연락해서 온 거야." 새연이 부끄러운 듯 그의 시선을 피했다. "절... 구해 주셨잖아요. 고맙다고 인사를 드리고 싶은데 기회를 안 주셔서요." 딱딱한 표정을 하고 있는 그를 그녀가 올려다보았다. "죄송해요... ." 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러면 안 돼. 넌 내 환자고 환자의 안전은 내 일이야... . 그리고 나는 내 생일이 언제 인지 몰라. 기록되어 있는 건 그냥 호적에 그렇게 되어 있어서 그런거고... . 다음부터는 이 러지 마." 새연이 무척 실망한 표정이 되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말을 마친 그는 그녀의 얼굴을 보 고 좀 심했나 싶어 미안한 기색을 띠며 돌아섰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그대로 가 버리고 말았다. 새연은 입술을 꼬옥 다물었다. 새연은 혼자서 촛불을 끄고 초코파이를 키작은 서랍장 위에 올려놓았다. 못내 섭섭했다. 그래도 조금은 기뻐해 줄 줄 알았다. 그녀는 우울한 기분이 되어 무얼 해야 하나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무미건조한 병실 풍경만 눈에 들어올 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외투를 걸쳤다. 지갑 하나만 주머니에 넣고서 병실 밖으로 나갔다. 밤이라 기온이 내려가서 그런지 추웠다. 그녀는 병원 현관에 있는 공중전화 박스로 들어갔 다. 여전히 시무룩한 표정을 한 채 친구 미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진이 놀라면서도 반겨 주었다. "이 밤중에 웬일이니?" "응, 좀 답답해서 나왔어." "계집애... , 또 죽을 생각하고 질질 짰구나? 얘! 너 이번 한 번만 더 수술하면 된다며?" "누가 그래?" "너 쓰러진 말, 괜찮은가 하고 병원에 전화했을 때 어떤 남자 의사가 그러던데?" "그래... . 넌 남자친구랑 잘돼 가?" "말도 마! 어젠 나보고 자기랑 동거하자고 그래서 앞으로 안 만날 생각이야. 알고 보니 까 아주 꼴통이더라구." 새연이 피식 웃었다. 그때 누군가가 주위를 둘러보며 나오는 게 보였다. 지민이었다. 미진이 수다스럽게 말하는 소리가 전화기를 통해 흘러나왔지만 새연은 지민을 쳐다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넌 우리보다 나이도 한 살 많은 애가 뭐하니? 병언에서 의사 하나 꼬셔 봐. 내가 마스 크만 따라 주면 그 병원 의사들 다 끝장내 놓을 텐데." 친구의 음성이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새연은 전화 박스 안쪽으로 몸을 바짝 붙이고 외투 깃을 세워 얼굴을 가렸다. 그 앞을 간편한 외출복 차림의 지민이 지나갔다. 그는 병원의 큰길가 쪽으로 걸어갔다. 새연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다가 친구에게 말했다. "얘, 미진아, 내가 다음에 전화할께." 그녀는 뭐라고 재잘거리는 친구의 말을 들을 새도 없이 전화기를 내려놓고 전화 박스를 나왔다. 지민은 큰길가에서 빈 택시를 잡아 타고 어디론가로 향했다. 그는 쓸쓸한 눈으로 오랜만 에 풀려난 죄수처럼 창 밖의 풍경을 낯설게 쳐다보았다. 택시 기사는 졸음이 쏟아지는 눈 을 비비며 운전하고 있었다. 지민이 탄 택시 뒤로 또 다른 택시가 따라오고 있었다. 새연이 탄 차였다. 앞의 택시는 삼각산의 꼬불꼬불한 아랫길을 달려갔다. 한참을 안으로 들어가서 지민이 택시에서 내렸다. 지민은 산 쪽을 한 번 쳐다보고는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를 태우고 왔던 택시가 길을 돌아가다가 뒤따라오던 택시를 스쳐 지나갔다. 새연은 뒷좌석에 앉아 있다가 돌아가는 택시를 보고 기사에게 세워 달라고 다급하게 말했다. "아저씨, 저쪽에 좀 세워 주세요! 예, 여기서요!" 새연은 차비를 지불하고 지민이 내렸던 쪽으로 가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산을 오르는 지민의 모습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숲속의 오솔길을 따라 걷는 그의 발걸음이 너무 빨라 새연은 따라가기에 벅찼다. 얼굴이 창백해진 채 이마에서는 땀방울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 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쌔근거리는 숨소리가 고르지 못했다. 지민도 조금은 숨이 찬지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는 잠시 멈추어 앞쪽을 살펴보더니 다시 걷기 시작했다. 산 중턱에 이르자 허름한 집이 한 채 나왔다. 그는 힘이 드는 듯 가쁘게 숨을 몰아쉬더니 본채인 듯한 곳으로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누군가가 나와 문을 열어 주었다. 위편호 교수였다. 지민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어서 오게나." 두 사람은 함께 안으로 사라졌다. 새연은 너무 힘이 들어서 지민을 따라가던 것을 멈추고 커다란 바위 옆에서 쪼그리고 앉 아 구토를 했다. 앞이 잘 보이지 않아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머리가 혼란스러워 고개를 흔들어 보았다. 식은 땀이 흘렀다. 그녀는 지민을 완전히 놓칠까봐 창백한 얼굴을 한 채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다시 언덕을 오 르기 시작했다. 눈앞에 집 한 채가 보이자 힘이 솟았다. 집에는 가운데의 본채인 듯한 곳에만 불이 환히 켜져 있을 뿐 어두컴컴했다. 또 다른 한 곳에서 희미한 불빛이 흘러나왔다. 새연은 그곳으로 가서 문틈으로 들여다봤다. 가쁜 숨소 리를 죽여 가며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안은 부엌인 모양이었다. 그 안에서 지민이 실오 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 자신의 몸을 씻고 있었다. 새연은 놀라 틈에서 눈을 떼었다. 불에 홍조를 띄우며 잠시 고민을 하던 그녀는 다시금 조심스레 안쪽을 들어야봤다. 벌거벗은 지민은 자신의 몸을 구석구석 정성스레 닦았다. 마 치 젯상의 제물이라도 되려는 것 같았다. 그가 차분하게 몸에 물을 끼얹었다. 새연은 숨을 죽이고 지켜봤다. 지민은 목욕을 마치자 하얀 무명옷을 경건한 태도로 입었다. 그리고 본채로 들어갔다. 새연도 본채로 옮겨가 문틈 새로 안을 들여다봤다. 안에서는 낯설고 현란스러운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새연은 침을 꼴깍 삼켰다. 부처님을 비롯한 각종 우상의 형상들 앞에 색동옷을 입은 50대 초반의 박수(남자 무당)가 촛불에다 향을 피웠다. 향의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박수는 다소 괴상한 느낌을 주 었고 사실 그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잘 가지 않았다. 위편호 교수는 한쪽 귀퉁이에 서서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무릎은 꿇고 앉아 있던 박수의 감은 눈이 파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양손이 흔들리 며 '광이 나기' 시작했다. 박수의 떨리는 양손의 파장이 점점 더 커져 가자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다섯 가지 색깔의 오방기 중에서 흑기를 뽑아 들더니 앞에 잇는 우상 들 중 흑제장군의 형상을 한 것에다 대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리듬에 맞춰 시조를 읊는 듯 했다. 죽는 것이나 불행하게 사는 것이나 악한 영과 노는 것이나 모두가 흑제장군님 손에 달렸는데 오늘 우리 불쌍한 지민이 무당 집안에 태어나고 무당대로 살 팔자인데 몸이 힘들고 마음이 아파 굿을 주제커나 영을 부르기가 싫다는데 모쪼록 장군님이 귀신 좀 데려가고 펑범한 사람, 착한 사람으로 평생토록 장군님 은덕에 고개 숙이고 산다 하니 부다 제발 힘든 기 좀 눌러 주소! 그 옆에 앉아 있는 지민은 박수의 기도소리를 들으며 지그시 눈을 감고 앉아 양손을 앞섶 에 모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박수가 양손을 번쩍 들자 딸랑거리는 방울소리가 울려 퍼지고 구석에 앉아 있던 남녀 한 쌍이 들고 있던 북과 꽹과리를 방울소리으 리듬을 따라 치기 시작했다. 이를 몰래 지켜보고 있던 새연은 가느다란 목으로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박수의 움직임이 차츰 강력해지는 것과 맞추어 북과 꽹과리도 그 리듬을 빨리 했다. 박 수는 발에 탄력이 붙으면서 계속해서 중얼거림과 추임새를 넣었다. 그가 숨가쁜 몸짓을 이 어갔다. 갑자기 박수의 어깨가 축 쳐져서 아무 힘도 없어 보이더니 드디어 흑제장군이 몸 속으로 들어갔는지 어깨를 쫙 펴고 얼굴에 무섭고 강한 주름을 만들었다. 진한 화장 때문인지 가 부키의 사무라이 같은 얼굴이 되었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서 구석으로 가더니 이내 자기 키만한 대나무 몽둥이를 들고 지민 앞 에 섰다. 새연은 흡! 하고 숨을 들이마신 채 그대로 멈추었다. 이윽고 박수는 손에 쥔 대나무 몽둥이로 인정사정 없이 지민의 어깻죽지를 내려쳤다. 새 연은 하마터면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지를 뻔했다. 지민은 감은 눈에 더욱 힘을 주었고 몽둥이가 어깨를 내리칠 때마다 조금씩 몸을 움츠리 기 시작했다. "나가라!"를 외치는 박수는 갈수록 몽둥이를 내리치는 손에 힘을 더해갔다. 지민을 때림과 동시에 퍽, 퍽! 소리가 진동을 했고 대나무 끝은 갈라지기 시작했다. 매질을 당하는 지민은 점차로 몸을 움츠리더니 수중치료실에서와 같은 자세를 만들었다. 몽둥이를 내리치자 박수의 손에서 선혈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고 부고가 꽹과리를 치는 사람 들도 상기된 표정으로 이를 지켜봤다. 마침내 지민이 옆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주먹을 꼭 쥔 채 입술을 깨물며 지켜보고 있던 새연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박수의 매질은 계속되었고 쓰러진 지민은 맞을 때마다 고통을 이기기 힘든 듯 몸에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녀는 눈물이 고인 눈을 감고 말았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박수는 광기어린 표정을 심하게 일그러뜨리는가 싶더니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는 듯 대나 무 몽둥이를 높이 치켜들었다. 몽둥이가 쇳소리를 내며 허공을 가랐다. 박수의 기합소리와 함께 지민의 머리를 향해 떨어지던 몽둥이가 갑자기 마치 같은 극의 강한 자석을 만나 튕겨 나듯 머리를 가격하지 못하고 튕겨져 나갔다. 그 강한 힘에 박수도 몽둥이를 놓치고 차려 놓은 상 위로 넘어져 엉망이 되고 말았다. 놀란 박수의 표정이 공포로 일그러지고 구석에 서서 지켜보고 있던 위편호 교수도 눈이 휘둥그래졌다. 새연도 비명이 터져나오려는 입을 손으로 막았다. 얼른 문틈에서 눈을 데고 일어나 물러 섰다. 사람들이 나오기 전에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안에서는 꽹과리나 북소리는 멈추고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다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넋 을 빼고 있다가 한 마디씩 하는 것이었다. 새연은 비탈길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두운 산길을 내려다보니 무서움이 왈칵 들었다. 올라올 때는 지민을 쫓느라 정신이 없었다가 이제는 혼자 내려가려니 무서울 수밖에 없었 다. 그때 불이 켜진 본채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밖으로 나오는 것이 보였다. 새연은 당황 해서 황급히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뭇잎에 옷이 스치는 소리에도 놀라 온몸이 오싹했 다. 그러나 그가 얼마나 화를 낼까를 생각하다가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내려가는 도중에는 사람 하나 만날 수 없었지만 처음 택시에서 내렸던 곳으로 가니 한 무 리의 사람들이 택시에서 내렸다. 새연은 급히 뛰어내려갔다. 출발하려는 택시에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택시! 택시!" 택시를 탄 새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수는 공부방에 엎드려 깜빡 잠이 들었다. 그녀는 악몽에 시달리느라 땀을 흘리며 괴로 워하더니 헉! 소리를 내며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책상 위에는 살펴보다 만 차트들이 쌓여 있었다.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차트를 다시 뒤적이기 시작했다. 1996년의 차트들이었는데 그 중에서 강지민이라고 쓰여진 차트들만 골라 열심히 뭔가를 찾았다. 강지민이 응급수술을 한 것으로 되어 있는 어린 환자의 차트가 나오자 긴장했다. 빠른 손놀림으로 뒷장을 넘기니 역시 기적적으로 살아나 퇴원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런 데 그 차트 아래쪽에 '재활의학과 김 기사의 장남' 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지수는 그 차트를 빼어 분류해 놓은 차트 맨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는 차트를 몇 뭉치씩 따로 분류하고 있었다. 그녀가 그렇게 밤을 보내는 사이 어느새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녀는 재활의학과로 갔다. 김 기사를 찾았더니 수중치료실에 있다고 했다. 그녀는 그를 좀 불러 달라고 했다. 김 기사는 다리가 불편한 10대 초반의 남자아이를 물 속에서 걷게 하고 있었다. 물이 가 득한 풀에서는 거품이 올라오며 부글거렸다. 동료 기사 한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와 그를 불렀다. "어이, 김 기사! 잠깐 나와 볼래?" 김 기사는 문 쪽을 보며 잠시 기다리라는 손짓을 한 뒤 아이가 다른 한 쪽 끝까지 오자 풀에서 나오게 했다. 그는 수건을 걸친 채 수중치료실 밖으로 나왔다. 지수가 간호사 한 사람과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간호사는 김 기사를 보더니 하던 이야기를 중단하고 저쪽으로 가 버렸다. 지수는 김 기사와 눈이 마주쳤다. 지수가 그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어디 조용한 곳 없을까요? 알고 싶은 게 있어서 그러는데요." 그는 무슨 일인가 싶어서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중요한 일입니다." 김 기사는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사람이 거의 가는 일이 없는 비품 창고 쪽으로 앞장서 서 걸어갔다. 두 사람은 깨지지 않을 만한 튼튼한 상자 위에 걸터앉았다. 지수가 잠깐 주저하더니 물었다. "강 선생님에 대해서 말인데요. 뭔가 펑범치 않은 비밀스런 점을 알고 계시다면 말씀 좀 해 주시죠." 김 기사는 입장이 매우 곤란하드는 듯 인상을 쓰며 딴 곳을 바라 보았다. 지수가 정색을 하며 그를 설득하려고 들었다. "강 선생님의 비밀을 파헤쳐서 나쁘게 만들려는 게 아니에요. 아드님이 강 선생님 덕분 에 살아난 것은 정말이지 잘된 일이지만 혹시라도 이상한 쪽으로 소문이 나면 강 선생님이 정말 곤란해집니다." 김 기사는 난처한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그... 그기 지가 뭘 알겠습니까? 기냥 강 선생님이 좋은 분이라는... ." 지수가 낮지만 강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김 기사님!" 그러자 김 기사는 절대로 말을 하지 않겠다는 듯 입을 꼭 다물었다. "기사님은 혼자서만 아신다고 생각하겠지만 제가 이곳 간호사들에게 이미 물어 봤습니다. 도대체 2~3일에 한 번씩 강 선생님이 김기사님을 만나고 꼭 둘이서만 수중치료실에 들어가 서 뭘 하길래 그런 이상한 소문이 나는 거예요?" 김 기사는 무슨 소리냐는 듯 그녀에를 쳐다보았다. "무... 무슨 소문이 나는데예?" 그녀는 말없이 그를 쳐다보가다 다짜고짜 물었다. "혹시 김 기사님 게이예요?" 그는 황당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게... 게이... 라고예? 호... 호모 말입니꺼?" 지수는 놀라는 김 기사를 빤히 쳐다보았다. 김 기사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그녀의 단호한 얼굴을 외면하며 고민했다. 그녀가 재촉하듯 그를 불렀다. "김 기사님!" 김 기사는 그동안 지민이 수중치료실에서 무얼 했는지를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여 가며 이야기를 들었다. 그가 이야기를 마치자 고맙다는 인사를 한 후 창고를 나왔다. 그녀는 마취과 의국으로 가서 해야 할 일을 체크한 다음 오후에 수술실 에 들어갈 일은 후배에게 부탁했다. 그녀는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엘리베이터를 타러 갔다. 4층에 이른 엘리베이터의 문이 띵 소리와 함께 열렸다. 지수는 생각에 잠겨 고개를 숙인 채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 우두커니 서 잇던 지민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순간, 고개를 든 지수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움찔 놀라고 말았다. 지민은 그런 지수를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황급히 태연한 얼굴을 했다. 그녀가 물었다. "어젯밤 어디 갔었어?" "찾았었니?" "그냥.. 안 보이길래... ." 그가 더 이상 대꾸를 하지 않아서 두 사람은 가만히 엘리베이터 안에 서 있었다. 그녀는 알 수 없는 착잡함으로 기분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는 문득 고개를 돌려 그녀가 가운 대신 평상복을 입을 걸 눈여겨 보았다. "어디 가?" "응... ." 두 사람은 다시금 서먹한 표정이 되어 앞을 쳐다보며 나란히 서있었다. 엘리베이터는 1층에서 멈췄다. 문이 열리자 두 사람이 내리고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들어갔다. 그녀가 현관 쪽을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이따 봐." 그는 반대쪽으로 가면서 대답했다. "그래." 그는 걸어가다가 뭔가 생각이 난 듯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불렀다. "닥터 표!" 그녀가 사람들 사이에서 뒤를 돌아보았다. "고맙다. 책." 지수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지민은 뭔가 느낌이 이상 하기는 했지만 정확하게 꼬집어 낼 수가 없었다. 그녀가 자기에게 섭섭해하는 감정을 가지 고 있다는 것 정도만 알 수 있었다. 현관을 나선 지수는 서운하다 못해 화가 났다. 마침 지나가는 후배들의 인사도 건성으로 받고 주차장으로 갔다. 그녀는 자기 차의 운전석에 앉았다. 곧바로 출발하지 않고 잠시 멍한 상태로 앞만 보고 있었다. 지민을 생가갛고 있자니 알 수 없는 두려움마저 몰려왔다. 여지껏 가까이 지내던 그에게서 왠지 낯설음과 배신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 무엇인가가 그를 노리고 점점 가까이 오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마음이 바빠졌다.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대형 서점 않은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책을 고르는 사람들과 카운터에서 계산하 는 사람들, 그리고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책을 주문하는 사람들까지 매우 북적 거렸다. 지수는 심령과학이나 초능력에 관한 책들이 꽂혀 잇는 책꽂이를 훑어보았다. 그 중에서 [원시무술과 현대의학]이란 책이 눈에 띄었다. 그것을 뽑아 들었다. 그녀는 무술과 현대의 학에 관한 책은 무조건 골라들었다. 그녀는 고른 책을 전부 카운터로 날랐다. 카운터의 점원 두 사람이서 한 사람은 책을 종이가방에 담고 또 한 사람은 계산기를 찍어 눌렀다. "모두 십칠만 삼천원 입니다." 지수는 신용카드를 건네 주고 점원이 두 개의 종이가방에 나누어 담아 주는 책을 받아들 었다. 신용카드를 돌려받은 후 서점을 나왔다. 책을 운전석 옆자리에 싣고 그녀는 도심 한복판으로 차를 몰고 나갔다. 많은 차의 행렬 리 꼬리를 물고 늘어서 있었다. 일단의 차량이 신호가 바뀜에 따라 정지선에 멈추어 섰다. 지수의 차도 거기에 끼었다. 그녀는 차를 정지시킨 틈을 타서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상대방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감사합니다. 신라호텔입니다." 지수가 말했다. "신경외과 학회에 참석하신 이석명 교수님 방을 부탁합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그녀는 한 손에 핸드폰을 든 채로 다른 한 손을 뻗어 책꾸러미에서 책을 한권 골라 펼쳐 보았다. 핸드폰에서 다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1601호입니다. 연결시켜 드리겠습니다." 핸드폰을 들고 있는 동안 신호음이 이어지고 그녀의 눈은 책의 내용을 읽고 있었다. 과거의 문헌을 보면 한자로 의사(醫師)라는 표기 대신 의사(　師)라고 쓰인 경우를 볼 수 있다. 즉, 술을 뜻하는 받침 대신 무당을 일컫는 무자가 쓰인 셈인데 이는 곧 고대에는 무 당이 의사의 역할을 담당했음을 말해 준다. 지수가 책을 읽는 동안 전화기의 신호음이 계속 가기는 했지만 받지를 않았다. 그녀가 책의 앞장을 펼치자 저자의 사진과 함께 눈부신 경력, 그리고 수십 권에 달하는 저서들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나이가 상당히 들어 보이는 저자의 사진도 있었는데 그의 이름 은 위편호였다. 그때 뒤에서 빵빵거리는 경적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보니 신호가 이미 바뀌어 있었 다. 백미러를 보자 뒤차의 운전사가 뭐라고 지껄이고 있었다. 지수는 핸도폰을 끄고 미안 하다는 표시를 뒤쪽에 한 다음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그녀는 도서관에 도착하자 두 꾸러미의 책을 들고 낑낑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한 손에 연필을 쥔 채 책을 읽는 데 열중했다. 그녀 옆 에는 펼친 책 외에도 다른 책들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그녀는 읽어내려 가다가 가끔씩 문 구에 밑줄을 그었다. 책에서는 기 치료가 가능한 초능력자들이나 무속인들에 대하여 원시적인 인간 본능의 부 활이라는 정의를 내리고 있었다. 고도로 물질 문명화 된 사회에서는 더 이상 필요가 없어 진 원시 인간들의 예지력과 치유 능력이 자신을 방어하고 있던 시스템이 붕괴되고 이로 인 해 위기 의식이 증폭되는 순간에 되살아나는 것이라고 적고 있었다. 해일을 피해 산에 오 르고 맹수에게 찢긴 동료의 상처를 쓰다듬어 치료해 주던, 그런 원시인들인 것이다. 9 새연은 병실 침대에 누워 눈을 말똥말똥 뜨고 천장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지난밤의 공 포가 가시지 않아서 밤새 피곤했는데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대나무 몽둥이로 맞기만 하고 있던 지민이 생각나 가슴이 아프기도 했다. 산을 어떻게 내려왔는지는 기억도 잘 나 지 않았다. 다만 너무나 무서웠던 기억밖에는 없었다. 다시금 등골이 오싹했다. 그녀가 눈도 깜박이지 않고 생각에 잠겨 있는데 노크소리가 났다. 문이 열리며 지민이 들어왔다. 새연은 찔끔 놀라 얼른 만화책을 집어들었다. 지민이 다가오자 더욱 열심히 만화를 보는 척했다. 그는 만화책을 보고 있는 새연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태연한 척하려고 애쓰며 만화책을 코앞에다 갖다 붙이자 지민이 만화책을 잡아 슬그머니 아래로 끌어내렸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들은 말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지민이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다음부터는 그러자 말아요... . 그러다가 길거리에 쓰러지기라도 하면 담당의사인 내가 곤 란해집니다." 새연은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지민을 올려다보았다. 지민이 다시 웃으며 물어왔다. "... 어디까지 본 거예요?"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솔직하게 대답하고 말았다. "... 처음부터 전부요." 지민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피식 웃더니 그녀를 보면서 말했다. "비밀로 해 줄 수 있겠어요?" 지민의 말에 새연의 얼굴이 기쁨으로 밝아졌다. 야단이라도 맞을 것 같아서 긴장했는데 그와 둘만의 비밀을 가지게 되다니 너무나 기쁜 일이었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머리룰 굴려 대뜸 물어 봤다. "공짜루요?" 그가 무슨 말인가 싶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공짜로는 안 돼요. 저 사실은 무서워서 죽는 줄 알았단 말이에요. 저랑 밖에서 데이트 한 번 해 주시면 비밀로 할게요." 그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건 안 돼요." 그녀가 입술을 내밀더니 말했다. "그럼 이따가 다 말할래요. 아저씨가 무당을 찾아가서... " 지민이 깜짝 놀라 그녀의 입을 막았다. 그러자 그녀가 씨익 웃었고 그는 어이없다는 표 정을 지었다. 새연은 더욱 생글거리는 얼굴로 졸랐다. "그러니까 해 줘요, 데이트!... 여지껏 한 번도 그런 것 해본 적 없단 말이에요." 그는 난감한 얼굴이 되어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그가 화가 난 건 아닌가 해서 뜨 끔했다. 문을 열고 나가려던 그가 돌아서며 말했다. "오후 반나절만이야." 지민이 웃으며 나가자 새연을 뛰어오를 듯 기뻐했다. 그녀는 환호라도 할 표정으로 주먹 을 쥐어 앞으로 힘차게 당기며 외쳤다. "예스!" 새연은 마음이 들떴다. 옷장을 열어 놓고 온갖 옷을 다 입어 보았다. 무엇을 입어도 마 음에 들지 않았다. 결국 가장 차분해 보이는 회색 원피스에 자주색 카디건을 걸쳤다. 가발 도 좀더 머리카락이 긴 걸로 바꾸었다. 상자를 열어 여러 가지 액세서리 속에서 긴 머리칼에 어울릴 것 같은 노란 리본을 달아 보았다. 그러나 옷 색깔과는 맞지 않는 것 같아 빨간 핀으로 바꾸어 꽂았다. 대충 준비가 끝났다 싶자 노크소리가 들렸다. 새연은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문이 열리고 지민이 들어오는데 휠체어를 밀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실망하는 빛이 열 력했다. 밖에 나가서도 환자라는 딱지를 달고 싶지는 않았다. 자기의 마음을 몰라주는 지 민에게 앙탈을 부렸다. "아저씨! 나 그냥 걸아갈 수 있어요! 그거 필요없단 말이에요... ." 지민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선택해! 여기에 앉아서 병원 밖으로 나갈 건지, 아니면 걸어서 병원 식당으로 갈 건지." 새연은 울상이 되고 말았다. "아이 참... !" 지민이 밀어 주는 휠체어에 앉은 새연은 자기 모습이 못마땅해서 입술이 튀어나와 있었 다. 지민은 택시 승강장 쪽을 행해 가다가 모퉁이를 돌자 말했다. "내려." 새연이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지민이 웃으면서 내리라고 턱짓을 하자 그녀가 내려섰다. 그는 휠체어를 밀고 주차장 수위실로 갔다. 수위에게 휠체어와 가운을 벗어서 맡아 달라고 부탁하고는 빈손으로 새연에게 갔다. 그녀는 눈이 동그래진 채로 지민을 보았다. 지민도 간단한 캐주얼 차림이었다. 진한 청색 스웨터에 크림색 면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는 어색한지 멋쩍어하더니 빙그레 웃으면서 새연에게 물었다. "어디 갈까, 우리?" 그녀가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제가 결정해도 돼요?" "응." "그럼 동물원에 가요." "동물원?" 새연이 지민의 팔짱을 끼면서 잡아 끌었다. "어서 가요." 택시를 탄 새연은 신기한 게 뭐 그리 많은지 한 가지도 놓치지 않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좋아했다. "어머나! 저것 좀 보세요!" "어머, 저 강아지 좀 봐!" "세상에, 저 사람은 머리에 저런 걸 달고 다녀요!" 활기에 넘치는 거리를 보며 새연은 많은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기도 하고 뛰기 도 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다. 병원생활을 끝낸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지만 지민과 함께 있는 그 시간만큼은 누구보다도 행복했다. 그의 얼굴에서도 미소가 떠나지를 않았다. 어느새 택시는 동물원 앞에 서 있었다. 지민은 먼저 내려서 새연을 부축해 주었다. 그는 뛰어가서 입장권을 두 장 사왔다. 평일이라서 그런지 동물원 안에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동물들의 울음소리나 새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려왔다. 유치원에서 단체로 구경을 왔는지 노란 복장을 한 아이들이 줄을 서서 끊임없이 재잘거리 며 선생님을 따라갔다. 새연은 그 아이들보다 더 신이 나는지 여기저기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지민은 기린이 있는 곳의 울타리 앞에 있는 철 구조물에 기대어 새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새연에게 물었다. "수술... 겁나지 않아?" 새연이 멈칫했다가 이내 태연한 얼굴을 했다. "겁내면 뭘 하겠어요? 어차피 해야 할 건 데... 왜요?" 그가 볼이 발그래해진 그녀를 보며 싱긋 웃었다. "꼭 내일이라도 퇴원시켜야 할 것 같아서... ." 새연은 지민을 힐끗 보더니 기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겁나고 두려웠어요. 그래서 많이 울었구요. 지난번에 수술할 때 까진... ." 그녀는 다시 지민을 쳐다보았다. "근데... 인제 겁 안 내기로 했어요. 어차피 죽을 건데 그 동안 만이라도 기분 좋게 살았 으면 해요." 그가 조심스레 그녀를 설득하려는 투로 말했다. "... 사람에게는 의지라는 게 있어. 설사 죽을 운명이라고 하더라도 살아 보겠다는 의지가 있으면 가끔씩은 기적도 일어나." 그의 말을 듣고 함찬 동안 잠자코 있던 그녀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아저씨, 그거 모르죠?" 지민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저 사실은 굉장히 재수없는 아이라는 거... " 새연의 어머니는 불임 때문에 고민하다가 입양을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남편의 의견을 물었더니 그는 아이가 없으면 어떠냐고 그녀를 위로했다. 그는 자상한 사람으로 그녀를 끔 찍이 위해 주어 애처가로 소문이 날 정도였다. 그러나 집에 하루종일 혼자서만 지내는 그 녀로서는 입양을 심각하게 고려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불임 클리닉에, 유명한 한의원은 다 가 보았지만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시 어머니도 좋다는 약은 다 해서 갖다주었지만 십 년 전부터는 아예 포기를 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그녀는 구역질을 심하게 해댔다. 소화가 안 되어서 그런가 하고 소화제를 먹어 봤지만 말짱 헛일이었다. 그녀는 내과를 찾아갔다. 의사는 진찰을 해보더니 산부인과를 찾아가라 고 했다. 그녀는 어이가 없고 황당해서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어쨌거나 그녀는 임신을 했다. 입덧이 어찌나 심했던지 3개월째에 병원에 입원했다. 산부인과 의사는 입덧이 아니라도 입원해야 할 상황이라고 했다. 너무 나이가 많이 든데 다가 전치태반에 임신중독증까지 걸린 것이다. 그녀의 얼굴은 퉁퉁부어 올랐고 나중에는 하혈 때문에 고생했다. 남편인 오정식은 거의 병원에서 살다시피 했다. 시어머니도 서울에 올라와서 음식이며 집안일을 맡아서 해 주었다. 그동안 그녀는 물질적으로는 부족함을 느낀 적이 없을 만큼 풍족하게 살았다. 남편이 부 동산 재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이가 오십이 다 되어 가는 때에 아기를 가지게 되니 기쁘면서도 불안하고 한편으로는 기가 막혔다. 그렇게 애타게 바라던 아이를 이제서야 갖 게 해 준 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예감하고 있었다. 아이가 태어나면 자신은 살아날 확률이 거의 없다는 것을... . 그렇지만 낳고 싶었다. 세상에 나오고 싶어하는 어린 생명을 죽일 수는 없었다. 정식이 그녀에게 말했다. "여보, 우리 아기 낳지 말까?" "왜 그래요, 당신?" "아기를 낳으려면 당신이 너무 위험하잖아." 그녀가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우리가 그렇게도 기다렸던 지상 최고의 선물인데 받지 않으려는 거예요?" "나에게 당신보다 소중한 건 이 세상에 없어." "그런 소리 말아요. 아기는 당신과 나의 분신이니 우리 두 사람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존 재예요. 그리고 내 느낌으로는 천사처럼 예쁜 딸이 나올 것 같아요." 그가 그녀의 머리를 다정하게 쓸어넘겨 주었다. "그래요. 우리 아기도, 당신도 건강하기만을 바랍시다." 그녀는 눈물을 겨우 참아 냈다. 아기가 태어나던 날 그는 의사에게 매달렸다. 아기보다는 산모를 꼭 살려 달라고... . 수 술실 앞에서 초조하게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그의 눈에 눈물이 어렸다. 그는 태어난 아기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할머니가 아기를 찾아서 집으로 데려갔 다. 그녀를 떠나보내는 그의 가슴은 너무나 아팠다. 오직 그녀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인생이 었다. 태어난 아기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장례식은 조촐하게 지내고 그녀는 화장을 해서 둘이서 자주 갔던, 그녀가 좋아하는 무안에 잇는 별장의 앞바다에 뿌려 주었다. 할머니는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아기에게 온갖 정성을 쏟았다. 며느리를 하늘나라로 보낸 손녀이지만 그렇게 사랑스럽고 예쁠 수가 없었다. 내심으로 아들을 바라기는 했지만 이제 와서 그런 게 무슨 소용일까 싶었다. 아들은 모든 일에서 의욕을 잃기 시작했다. 알콜 중독자가 될 만큼 술을 마시고 다녔다. 안경 공장이니, 신발 공장이니, 무역업이니 하는 사업도 뒷전이었다. 아이를 봐도 시큰둥했 다. 아기 이름도 2주일이 지나서야 지었다. 아기 이름은 오새연, 아기는 그리 건강하지 않아서 할머니의 애를 태웠다. 정식은 아기가 아프면 걱정보다도 짜증만 냈다. 새연이 세 살 정도 되면서 걷기도 하고 말도 곧잘 하자 정식은 조금씩 정을 붙여 가기 시 작했다. 새연은 아빠의 사랑을 듬뿍 받으려고 작정이라도 한 듯 예쁘게 자랐다. 게다가 착 하고 똑똑하기까지 했다. 새연이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정식의 사업이 눈에 띄게 기울어 갔다. 그는 다시 술 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는 늦은 밤에 들어와 어린 새연에게 트집을 잡아 화를 버럭 내곤 했다. 새연은 아빠를 슬슬 피하며 무서워했다. 할머니의 품속만 파고들었다. 아빠와 함께 유원 지에 놀러 가거나 학예회 때 아빠가 올 것을 기대할 일이란 없었다. 그는 새연이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쯤 집 몇 채와 통장 몇 개만을 만기고 모든 땅과 공장 들을 날리고 말았다. 그가 더욱 충격을 받은 것은 둘도 없는 친구에게 사기를 당했기 때문 이었다. 그가 경찰을 동원해 찾으러 나섰을, 때는 친구가 이미 미국으로 종적을 감춘 뒤였 다. 그는 홧병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는 병원에 입원했지만 시름시름 앓았다. 새연이 중학교 교복을 입은 지 얼마 안 되어 그는 새연을 불러 옆으로 오게 했다. 그는 딸의 손을 꼭 잡았다. "새연아, 아빠가 새연이한테 잘해 준거 하나도 없지?" 새연이 큰 눈에 눈물을 가득 담고 말했다. "아니야, 아빠. 아프지만 않으면 돼요. 빨리 나아서 함께 집으로 돌아가요." "아빠는 곧 일어날 거야. 새연아, 아빠가 그동안 새연이한테 제대로 못해 주기는 했지만 널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 새연이 울먹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새연이가 아빠하고 제일 하고 싶은 게 뭐야?" 새연이 고개를 흔들었다. "한 가지만 말해 봐. 아빠 소원이야." 해연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아빠랑 동물원에 가 보고 싶어요." "동물원?" "네, 초등학교때 친한 친구들이 엄마랑 아빠랑 동물원에 갔다 왔다고 하면 제일 부러웠어 요." "그럼 아빠한테 말하지 그랬어?" "그땐... ." 새연이 말끝을 흐리자 정식은 마음이 아파 눈을 감고 말았다. "아빠가 어린 네 마음에 상처만 준 것 같구나." 새연이 외치듯 말했다. "이젠 그런 거 부럽지 않아요, 아빠랑 같이 오래오래 살기만 하면 돼요." "그래 고맙구나. 내일은 날씨가 화창할 거야. 우리 꼭 동물원에 가자, 알았지?" 해연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뒤로 듣고만 있던 할머니가 눈물이 터져나오는 것을 참지 못하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새연은 그날 아버지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아버지가 갑자기 의식을 잃으면서 상태가 아 주 나빠졌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새연과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눈을 감지 못하고 딸의 이름만 내내 부르다가 숨을 거두었다. 할머니가 통곡을 하다가 일어나 아들의 눈을 감겨 주었다. 새연은 눈앞에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엄마가 없어서 겪었던 슬픔과 아픔을 이젠 두 배로 감당해 내야 한다는 생각에 두려워서 눈물도 나지 않았다. 아버지의 장례식은 초만원이었다. 병원에는 얼굴 한 번 비치지 않았던 사람들이 연락도 하지 않았는데 잘들 알고 찾아왔다. 그리고 어찌나 애통해하는지 보는 사람을 안타깝게 할 정도였다. 그들은 장례식이 끝난 이후로도 돌아가지 않고 새연의 집에 모였다. 할머니가 돌아가라 고 해도 듣지 않았다. 그들은 아버지가 사업을 할 때 자신들이 무엇을 얼마나 도와 주었나를 일일이 늘어놓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매섭게 쫓아내던 할머니가 차츰 누그러들었다. 혹 그들이 나중에 새연이 살아가는 데 도움을 주지는 않을까 생각한 것이었다. 그래서 집을 두 채만 남기고 나머지를 처분하여 나누어 주었다. 기가 막히게도 몇몇 몰염치한 사 람들은 부족하다고 더 내놓으라고 대들었다. 할머니는 그들에게 경찰을 부르겠다고 했다. 그래도 친척이니 남들보다 낫겠지 한 건 착각이었다. 할머니는 남은 집 두 채는 새연 이 외에는 아무도 손댈 수 없도록 변호사를 찾아가서 서류를 만들어 놓았다. 친척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그들은 올 때마다 선물을 한아름씩 안고 왔다. 그때 고모도 할머니를 찾아왔는데 고모부가 사업에 실패했으니 재기할 자금을 대 달라고 생떼를 썼다. 할머니가 단호하게 거절하자 그럼 아이들과 함께 길거리에 나앉게 생겼으니 들어와서 살게라도 해 달라고 했다. "엄마, 딸이 굶어죽게 생겼다는데 정말 이러기유!" "그렇다고 정식이도 없는 이 마당에 여기 와서 이러면 어떻하냐." "오빠가 동생이라고 해 준 게 뭐가 있는데? 하나밖에 없는 동생한테 남겨 준 것도 없는 데 와서 사는 것도 못하게 하면 돼?" 할머니는 그것까지 거절하지 못했고 고모는 고모부와 아이들 셋을 데려와서 살기 시작했 다. 고모는 할머니와 새연에게 온갖 정성을 다했다. 청소와 빨래, 오리까지 도맡아 했기 때문에 파출부를 부를 필요도 없었다. 새연은 이 세상에는 나쁜 사람도 참 많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달이 지난 어느 날 고모가 통장과 도장을 훔쳐서 가족들과 함께 야반 도주를 하고 만 것이다. 할머니는 밤을 지새우며 울었다. 고모라는 사람이 그런 짓을 했으니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할머니는 새연의 앞날이 걱정되었다. 새연은 오히려 할머니가 내내 상심만 하고 있다가 쓰러지기라도 할까봐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정작 아픈 사람은 새연이었다. 가끔 머리가 아프다고 해서 아스피린을 먹었었는데 갈수록 증상이 심해지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새연을 끌고 종합병원으로 가서 정밀 검사를 시켰다. 검사 결과는 뇌종양이었다. 할머니는 기가 막혀 했다. 내가 너무 오래 살았나 보다고 한탄을 했다. 할머니는 살던 집을 전세로 내 주고 조그만 비으로 옮기고 남은 돈으로 새연의 수술을 하기로 했다. 이번에도 친척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화환이며 과일을 사가지고 찾아왔다. 할머니는 기 력이 없어 이제는 그들을 막지도 않았다. 그들은 찾아와서 갖은 말로 위로를 하고 아부를 했다. 할머니는 새벽 기도를 다니기 시작했다. 손녀를 위해서 기도했다. 새연은 할머니가 너무 힘들까봐 말렸지만 정성이 부족하면 안된다고 기어코 다녔다. 병실에서는 그녀에게 성경을 읽어 주었다. 그녀도 할머니가 성경을 일거 줄 때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그렇지만 이후로도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의사가 주의를 주었 다. 새연은 바로 퇴원하지 못하고 완쾌가 될 때까지 입원해 있었다. 머리는 빡빡 깎이고 거 기에 길다란 수술 자국까지 생겼다. 그녀는 할머니에게 부탁해서 모자를 사 달래서 쓰고 다녔다. 입원해 있는 동안 병원에서 사람도 많이 사귀었다. 그래 봤자 할아버지 할머니에 아저씨 들이라 재미가 없었다. 새연은 시간만 나면 창가에 서 있곤 했다. 같은 또래 친구들은 모 두 힘차게 뛰어놀거나 공부를 하고 있을 텐데 자기만 이런 곳에 있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외 로운지 몰랐다. 퇴원하는 날은 할머니와 백화점에 가서 어울리는 가발을 두세개 샀다. 가발을 쓰니 감쪽 같았다. 할머니는 다시 재발할지도 모르니 충분히 쉬고 내년에 학교를 다시 다니라고 했다. 새연은 펄쩍 뛰었다. 친구들보다 한 학년 낮게 다닐 생각을 하니 암담했던 것이다. 동생 들하고 친구를 해야 하는 건 정말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할머니의 고집을 꺾을 수 는 없었다. 할머니는 새연에게 집으로 친구들을 자주 부르라고 했지만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 다. 숙제를 같이 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아직은 마음대로 뛰놀기도 힘들었다. 새연이 삶의 희망을 잃고 모든 것을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포기한 것은 다음 해에 할머 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부터였다. 이 세상은 불행한 사람만 계속 불행해진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손녀 하나 때문 에 고생만 하신 할머니에게 미안해서 목이 메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 다. 잘하던 공부도 내팽개쳤다. 아무런 소용도 없는 짓이었다. 자기네 집으로 들어와서 살라 는 친척들도 많았다. 그러나 새연은 그들이 정말 뭘 원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말 이 나올 때면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집안이 이렇게 되고 보니 친척들이 그녀 몰래 속삭이곤 하는 소리가 있었다. 그녀가 태 어나지 말았어야 한다고... 그녀는 종양이 재발했고 그때부터 병원에서만 지내다시피 했다. 이제 그녀는 어떻게 살 까를 걱정하기보다는 하루라도 아프지 않고 편안히 죽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새연은 옛날 일을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슬픔을 담은 눈으로 지민을 쳐다보았다. "사람들을 만나면 그런 생각부터 들어요. 혹시 이 사람도 나 때문에 재수없는 일을 당하 면 어떡하나? 그래서 사람 만나기가 두려워요. 솔직히 말하면 아저씨한테도 무슨 일이 생 길까봐 걱정이 돼요." 지민이 한 마디로 단정지었다. "틀린 생각이야." 새연이 생긋 웃었다. "근데 아저씨는 딴사람들하고는 다르게 보여요. 뭐랄까, 내가 아무리 재수가 없어도 그게 안 통할 것 같아요. 헤헤헤." 지민이 그녀의 말에 뭐라고 해야 할까 암담해하고 있는데 그녀가 가게 쪽으로 뛰어갔다. "아저씨, 나 떡볶이 사 줘요." 그는 입을 굳게 다물고 그녀를 따라갔다. 지민은 가게로 들어가 떡볶이 2인분을 시켰다. "또 뭐 먹고 싶은 건 없어?" 새연이 메뉴판을 보더니 말했다. "음, 오뎅." 지민이 주인 아주머니를 보고 말했다. "아주머니, 여기 오뎅도 좀 주세요." 새연은 신이 나서 먼저 나온 떡볶이를 먹기 시작했다. 그녀는 먹는 모습을 보기만 하고 있는 그에게 떡볶이를 하나 포크로 찍어서 입에 넣어 주려 했다. 그가 피하느라 얼굴이 뒤 로 제꼈다. "아이, 아저씨! 드셔 보세요." 지민이 마지못해 그녀가 내미는 떡볶이를 받아 먹었다. 새연이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맛있죠? 맛있죠?" 지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떡볶이에 오뎅까지 거의 혼자 먹다시피 했다. 두 사람은 가게를 나와 호랑이를 보러 갔다. 시베리아 호랑이가 자기의 갑갑함을 동물들 모두에게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커다랗게 포 효해 댔다. 호랑이를 보고 있던 지민이 갑자기 머리가 아픈 듯 인상을 썼다. 미간을 찌푸 리며 호랑이를 쳐다보았다. 이공 철창과 계곡의 저편에서 으르렁거리던 호랑이가 슬금슬금 계곡 끝까지 나오더니 멈 춰 서서 지민을 바라보았다 지민도 호랑이가 애처로운 듯 자비로운 눈길을 보냈다. 호랑이가 지민에게서 뭔가 교감 이 느껴지는지 울어 젖히자 새연이 호랑이의 눈길을 따라 그를 쳐다보았다. 지민은 갑자기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멍한 표정을 지었다. 새연은 뭔가 이상해 보여서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가 그녀를 쳐다보았지만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괜찮느냐고 물어보는 소리가 호랑이의 포효소리에 묻 히고 말았다. 지민의 귀에는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나 무로 빽빽한 산과 계곡을 보았다.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소리나 케이블카의 원동기 소리, 심 지어는 자신을 향해 계속 뭐라고 하는 새연의 말소리까지도 사라지고 멀리서 들려오는 새들 의 지저귐이나 나무 사이를 뚫고 지나가는 바람의 소리와 함께 아득한 원시 수풀림 속에서 나 들을 수 있는 동물들의 평화롭고 자연적인 소리만이 들려왔다. 갑자기 주위가 환해지며 소리만 남았다. 그리고... 그 소리들마저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그 는 자신의 얼굴 옆으로 노랑나비 한 마리가 팔랑거리며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행복한 표정이 된 그는 나비를 잡으려고 자기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다. 나비가 그의 손 에 닿으려는 순간 문득 모든 환상이 깨지고 말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지민의 손이 새연의 볼 아래에 가 있었다. 새연은 얼굴이 빨개진 채로 나지막히 그를 불렀다. "아... 아저씨." 지민은 자기의 손이 새연의 볼에 닿아 있는 것을 알고서도 놀라거나 떼려고 들지 않았다. 새연은 부끄러운 듯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지민은 가냘픈 새연을 품에 꼬옥 안아 주었다. 지민이 산꼭대기를 가리켰다. "우리 저 위에 올라가 볼까?" 그는 그녀를 데리고 리프트 승강장으로 갔다. 새연은 리프트가 높은 곳까지 올라가자 무서움이 와락 들어 지민의 팔을 붙들고 비명을 질렀다. "까악! 무서워요!" 지민이 웃으며 그녀의 어깨에 팔을 올려 가볍게 안았다. "괜찮아. 네가 아무리 소리 질러도 떨어질 일은 없을 거야." 그의 말에 그녀가 피식 웃고 말았다. 정상에 이르자 두 사람은 리프트에서 내려서 조금 더 올라갔다. 산 꼭대기에 이르니 바 람이 세졌다. 머리칼과 옷자락이 날리자 그는 새연이 입고 잇는 옷의 깃을 세워 주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녹음으로 우거진 숲에서는 자기 짝을 찾아 헤매는 새소리만이 들러올 뿐 조용하고 평화로 웠다. 새연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 원래 의사가 되고 싶으셨던 거예요?" 지민은 허공을 보았다. "글쎄... ." 지민은 잠시 말을 멈추고 과거를 회상하듯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는 마치 혼잣말을 하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민에게는 어릴 때 동생이 하나 있었다. 그가 일곱 살 때 태어난 아기였다. 아기는 태 어날 때부터 뭐가 잘못 됐는지 항상 업어주고 놀아 주는 그와 한 번도 눈을 마주치지 못했 다. 눈동자가 처지고 고개를 떨구고 있는 아이를 업고 그는 마을로 들로 뛰어다녔다. 그곳은 산동네로 스무 가구고 채 안 되는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그는 놀다가 아이가 울면 집으로 데려가 무당인 어머니에게서 젖을 먹인 다음 또 돌아다 녔다. 굿판이 벌어지는 날은 한참 동안 젖을 먹이지 못했다. 그러면 아기는 우는 것도 힘이 들 어 소리도 잘 내지 못하다가 결국은 잠이 들고 말았다. 아기가 분명 어디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때 당시에, 그것도 산동네에 사는 지 민네의 형편에 병원에 간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그저 좋다는 약초나 써 보는 게 고작이었다. 마을 사람들의 눈총도 한몫 차지했다. 무당인 어머니의 신기로 그 정도는 고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마을 사람들의 눈총에 얽매여 꼼짝도 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지민이 잠이 든 밤이면 아이를 안고 새끼를 잃은 짐승의 울음과도 같은 소리로 흐느끼곤 했다. 그럴 때면 지민은 잠든 척하고 있다가도 불안해져서 어머니를 몰래 힐끔거 렸다. 아기는 귀에서 고름이 터져나오면서 상태가 극도로 나빠졌다. 동네 사람들은 어머니를 욕했다. 신기가 제대로 내린 무당이 아니어서 제 새끼인 아기가 그렇다고... . 그렇잖아도 곱지 않았던 마을 사람들의 어머니에대한 시선이 한층 나빠졌다. 그들은 어느날 집에서 무리를 지어 들이닥치더니 거적에 둘둘 만 것을 마당에 털썩 내려 놓았다. 거적 안에는 지난번 어머니가 굿을 해 주었던 사람이 들어 있었다. 그는 이유없이 시름시름 아파서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 있기만 했는데 보다못한 그의 어머니가 굿을 해 달 라고 했던 것이다. 그의 어머니가 마당 한가운데 나앉더니 땅을 치며 통곡하기 시작했다. "아이고! 아이고! 저 무당년이 내 아들 죽여 놨네! 아이고, 난 어떻게 살라고!" 마을 사람들은 어머니를 앞에 놓고 삿대질을 하며 비난하기 시작했다. 아기도 저주를 받 아서 그런 거라고들 했다. 무지한 마을 사람들의 터무니없는 오해가 어머니에게도, 동생에게도 그리고 지민에게도 상처와 슬픔을 가져다 주었다. 밤을 새워 운 다음날 어머니는 다시 집으로 몰려온 마을 사람들과 동생을 산 아래 마을의 병원에 데려간다고 하면서 나갔다. 그 이후로 동생은 집으로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 지민의 눈동자가 약간 충혈이 되어 있었다. "살아 있는 동생을 본 게 그때가 마지막이었어. 불쌍하게도 병원은 커녕 약 한 번 제대 로 써 보지 못한 거지." 그는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보았다. "그런데... 내 동생을 마지막 본 날이 네가 태어난 날이야." "그럼... 제 생일날 죽은 거예요?" 그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어쩔 줄을 몰라 그를 쳐다보는데 그의 눈에 조 그맣게 이슬이 맺힌 것이 보였다. 그녀는 입을 다물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는 산 아래의 풍경을 넋을 잃고 보고 있었다. 그녀는 차갑기는 하지만 맑은 공기를 마 음껏 들이마셨다. 그에게서 그런 애틋한 사연을 듣고 나니 혼자서만 불행하다고 항상 한탄했는데 이제는 그 러자 말아야겠따는 생각이 들었다. 태어나자마자 고통스럽게 살다가 세상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떠나간 생명도 있다고 생각하니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지민도 동생에 대한 기억 때문에 아직까지 힘들게 살고 있지 않은가. 그가 생명을 구하고 지켜 주는 의사의 길로 들어선 것은 동생의 바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지민이 새연의 어깨를 툭 쳤다. "우리 이제 그만 내려갈까?"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을 태운 리프트가 아래로 아래로 향했다. 그녀는 올라갈때만큼 무섭지 않았다. 리프트 아래 초원에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그들은 동물원 앞에서 택시를 잡아 탔다. 택시 안에서 지민이 물었다. "오늘 재미 없었지?" 새연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너무 좋았어요." 그가 싱긋 웃었다. "그리고 아저씨한테서 동생 이야기랑 마음속에 잇는 이야기를 들은 게 제일 기뻤어요." 그가 얼굴을 굳히며 앞을 보았다. "별로 좋은 이야기도 아닌데... ." "그래도 저한테는 소중한 이야기예요." 택시는 강변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강 건너편으로 각 층마다 군데군데 불을 켜 놓은 마 천루들이 마치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지껏 정말 많은 시간은 병원에서 살았어요. 솔직히 나... 의사 선생님들이 정말 싫었어 요. 내 사진을 보면서 죽는다, 산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할 거 다 하잖아요, 몇 달 동안 하 루에 두세 번 씩 잠깐 보고선 어느날 갑자기 머리를 깎고 수술을 하고... 나는 너무너무 아 픈데... ." 지민이 애처로운 눈길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길고 까만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슬픔을 삼키는 듯 한동안 말이 없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정말 더 싫은 건 저 자신이에요. 그렇게 미워하다가도 의사 선생님을 막상 보게 되면 저도 모르게 매달리게 돼요. 아주 고분고분 말도 잘 듣고... . 내가 너무 치사한 것 같아요. 헤헤헤." 그녀는 태연한 표정을 지으려 애쓰며 그의 눈길을 피해 시선을 창 밖으로 돌렸다. 눈에 고인 눈물 때문에 바깥의 풍경이 흐려져서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소매로 쓰윽 눈물을 닦고 눈을 깜박이며 여기 저기 높고 낮은 건물과 강, 유람선, 사람들을 유심히 보았다. 언제 다시 나올 수 있을지, 어쩌면 영원히 나오지 못할지도 모르기에 모든 것을 머 릿속에, 가슴속에 담아 두고 싶었다. 병원이 가까워 오자 그녀는 안도감이 느껴지면서도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마음이 생겨 나 는 걸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택시에서 내린 지민은 그녀를 기다리게 하고 휠체어와 가운을 찾아왔다. 그녀는 내키지 않았지만 그의 눈치를 살피며 얌전히 휠체어에 앉았다. 병원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낮처럼 분주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 갔다. 그는 복도 끝에 잇는 그녀의 병실을 향해 묵묵히 휠체어를 밀었다. 복도에는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어 스산한데다 창에서 새어 들어오는 달빛과 희미한 전등이 두 사람의 심정을 나 타내듯 어둡고 차가웠다. 병실 앞에 다다를 때까지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문의 손잡이를 잡고 돌리려 하자 앉아 있던 새연이 일어났다. 그가 그녀를 쳐다보 았다. 그녀도 그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더니 자기의 머리로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슬며시 가발을 벗어 내렸다. 그는 다소 놀라면서도 침착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그녀의 머리는 오랜 투병 생활을 말 해 주리라도 하는 듯 듬성듬성 자란 짧은 머리카락 사이로 깊은 수술자국이 나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숨소리가 고르지 못했다. 그녀가 부끄러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 흉하죠?" 그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고백하는 투로 말했다. "지난번에 나, 아저씨 목욕하는 거 봤어요... . 저는 이게 제일 부끄러운 모습이에요." 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자기를 쳐다보고 잇는 지민을 마주 보았다. "어차피 수술하면 들킬 거 같아서... 그냥 미리 매 맞고 싶은 거... 뭐 그런 거... "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그가 그녀의 목을 살짝 감쌌다. 그리고는 살짝 앞으로 당겨 수술 자국 투성이인 그녀의 머리 위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가 파르르 떨며 그의 품속을 파고들 었다. 그는 주위를 의식하느라 긴장하며 어깨를 다독거려 주었다. 순간, 새연이 와락 지민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자신의 입술로 그의 입술을 덮어 버 렸다. 지민이 당황해서 그녀를 떼어 내려는데 눈물이 그의 볼에 와 닿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눈을 꼭 감으며 입술을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포옹을 풀었다. 그녀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는 눈으로 그에게 애원했다. "저... 아저씨가 수술하시면 안 돼요?" 그가 충혈된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잘못되어도 괜찮아요." 그녀를 묵묵히 쳐다보고만 있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주저하는 듯 보이던 그가 승낙하자 그녀는 기쁨과 슬픔이 범벅이 된 표정으로 다시 그의 품에 안겨들었다. 그는 체 념의 한숨을 목구멍 깊숙히 삼켜 버렸다. 돌아선 그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중대한 결심을 해야 하는 사람처럼 그의 얼굴에서는 비장함 마저 느껴졌다. 10 지수는 책을 읽고 있다가 무심결에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았다. 건너편 테이블에 지 민과 새연이 머리를 맞대고 뭐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그녀는 깜짝 놀랐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려다 보니 그들은 비슷하게 닮은 사람들일 뿐이었다. 지수는 쓴웃음을 띄우며 창 밖을 봤다. 도서관에서 책을 본 지가 벌써 반나절이 넘었던 모양이다. 바깥에는 어둠이 깔려 있었다. 어둠을 뒤로 한 유리창에 그녀의 모습이 비쳤다. 유심히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화장기도 별로 없고 어떻게 보면 매우 평범한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지수는 다시 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초능력자들이나 무당들이 물을 좋아한다는 것과 사람에 따라 벌거 벗은 채 방 안에 웅크 리고 잇기를 좋아한다는 사실 등은 태아 시절의 자궁 회귀적 본능임을 앞서 언급한 바 있으 며 또한 어떤 무당의 경우 인간의 영혼을 자주 나비로 표현한다는 사실은 유럽의 스칸디나 비아 반도에서의 민속 신앙과 흡사하여... 글을 읽어내려 가던 지수의 얼굴이 조금씩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허리춤에 차고 있 던 호출기의 요란한 신호음에 정신을 차렸다. 병원에서의 호출이었다. 그는 책을 챙겨 들고 일어났다. 병원에 다 이르러 호출이 한 번 더 왔다. 그녀는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최 간호사 가 받았다. "어떤 여자분이 찾아오셨는데요. 안 계신다고 해도 다짜고짜 선생님을 만나야 한다고 하 잖아요." "그래요. 지금 병원에 도착했거든요. 곧 올라갈게요." 지수가 주차장 언덕을 올라가는데 그녀의 차 앞으로 휙 하고 누군가가 지나갔다. 그녀는 놀란 나머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브레이크를 밟았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차를 몰아 구석에 주차를 했다. 그녀는 시동을 끄고 사이 드를 올리며 백미러를 보다가 놀라서 얼어붙고 말았다. 백미러 속에는 한복을 차려입고 틀 어 올린 머리에 비녀까지 꽂은, 눈매가 아주 날카로운 50대 중반의 여자가 그녀를 쏘아보며 앉아 있었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복은 많아 보이네." 지수는 뒤를 돌아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백미러를 통해 그녀를 보며 얼어붙은 입을 겨우 열었다. "누... 누구시죠?" 그녀는 거기에 대답은 않고 담배를 입에 물더니 성냥을 켜서 불을 붙였다. 그리고 뻐끔 뻐끔 몇 모금 빨더니 물었다. "처자가 우리 애를 좋아한다지?" 그녀는 지민의 어머니였다. 지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후- 하고 연기를 내뿜었다. "불쌍한 놈... ." 지수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내가 구구절절이 이야기해 봐야 아가씨 해골만 복잡해져... . 그니께 딱 두 가지만 얘기 할라고 왔어. 첫째로 그 녀석한테 벌받을 연놈들이야 나하고 마을사람들이지 괜시리 죄도 없는 지가 그꼴로 살 이유가 하등 없다고 전해 줘." 지수가 그제서야 뒤를 돌아보았지만 차 안에 가득 찬 연기 때문에 안개에 싸인 듯해서 뒷 좌석에 앉은 사람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그녀가 또 물었다. "처자가 우리 애랑 맺어지고 싶은가?" 지수는 대답 대신 연기 때문에 눈을 비볐다. "그라믄... 그 자식한테 자기 동생이 하자는 대로 했다가는 황천이 지척이 될 거라고 전하 고 다신 그 짓을 못하게 혀! 그거이 다 제살 깎아먹는 짓인게." 지수는 흠칫 놀랐다. 그렇지 않아도 지민을 이해할 수가 없는데 그의 어머니의 이야기까 지 듣고 있으려니 온통 수수께끼 투성이 같았다. 지수가 얼이 빠져 있는 사이 차에서 내리 려던 지민 어머니가 문득 지수를 쳐다보며 말했다. "식 올리믄 한 번 찾아오고." 그녀가 차에서 내리자 지수도 얼른 자신도 차에서 내렸다. 그러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 다. 지수는 혼란스런 표정으로 계속 둘러보았지만 그녀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얼이 빠져 멍청하니 서 있다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마취 귀신이라도 만나고 난 것 같았다. 그녀는 데스크로 가서 최 간호사를 찾았다. 최 간호사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어머, 그분 좀전에 내려가셨는데 , 어떡하죠?" 지수가 물었다. "나를 찾아오셨다는 그분 말이에요. 한복을 입고 머리에 비녀를 꽂고 있지 않으셨어요?" 최 간호사가 놀랐다. "어떻게 아세요? 만나신 거예요?" "네, 잠깐 만났어요." "다행이네요." 지수는 여전히 기분이 이상했다. 그녀는 마취과 의국에만 잠깐 둘러 보고 곧바로 공부방으로 갔다. 보던 책을 마저 볼 생 각이었다. 지민은 새연의 병실에서 나와 병원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자마자 응급환자를 한 사람 받은 다음 12시가 다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열쇠를 꺼내어 현관 문을 열려고 하던 그가 흠칫 놀랐다. 문이 열려 있었던 것이다. 안으 로 들어가 보니 흰 고무신 한 켤레가 얌전히 놓여 있었다. 지민은 곧바로 어머니가 와 있 음을 알아차렸다. 방에 들어서자 불도 켜 놓지 않고 방 한가운데 앉아 있는 어머니가 보였다. 담배를 피워 물고 있어서 담뱃불만 빨갛게 보였다. 그가 스위치를 올려 형광등을 켰다. 어머니가 그를 올려다 보았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바닥에 앉으며 서먹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저녁은... 드셨어요?" 어머니는 거기에는 대답도 않고 담배만 피웠다. "어쩐 일이세요?" 어머니가 그를 날카로운 눈으로 한 번 쳐다보았다. "그냥 가려다가 들렀다." "죄송해요. 한번 찾아가 보지도 못해서... ." "됐다. 너만 잘 살믄 난 아무렇지도 않어." 그가 고개를 푹 숙였다. "지수라는 애를 만났다." 그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머니가 지수를 어떻게 아시고... ?" "그냥 아는 수가 있다." 그는 다시 물으려다가 그만두었다. "똑똑하게 생겼더구먼. 복도 많을 것 같고. 너만 마음을 잡는다믄 둘이서 잘살 수 있을 건디." "어머니, 저는 아직 그런 생각은 해보지 않았어요. 또, 저하고 결혼해 봤자 지수만 불행 해지구요." 어머니가 그를 노려봤다. "니가 동생만 잊으믄 다 될 일이여!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거냐! 이제 그만혀! 내 가슴에 니마저 못을 박을 거냐, 이눔아!" 서릿발 같은 어머니의 목소리에 그는 뜨끔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었 다. 어머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가 고개를 들오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어디를 가시려고요?" "난 이만 가 볼란다. 니헌테 언제 나가 필요했더냐." 그가 어머니를 붙잡으며 일어섰다. "새벽이 다 되어 가는데 어디를 가시겠다는 거예요?" "됐다, 상관 마라!" 그는 나가는 어머니를 쫓아서 골목 끝까지 갔다. 어머니는 빠른 걸음으로 바람처럼 걸어 가며 매섭게 말했다. "그만 쫓아오거라!" 그가 주춤한 사이에 어머니는 벌써 저만치 사라지고 있었다. 그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를 떠나온 지가 벌써 20년이 다 되 어 가고 있었다. 동생이 죽은 후로 어머니와 그는 마을을 떠나 이사를 가기는 했지만 산만 벗어났을 뿐 시골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초등학교를 마친 뒤 서울로 올라와 자취생활을 했다. 어머니는 어떻게 만드는지는 몰라도 생활비를 꼬박꼬박 보내 주었다. 그가 서울로 올라가겠다고 했을 때 어머니는 반대도 찬성도 하지 않고 묵묵히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날 밤 뜬눈으로 지세더니 날이 밝자 서울로 올라갔다. 방을 알아보고 온 것이었다. 전학 수속도 마쳤다. 그는 책과 옷가지만 챙겼다. 하기야 달리 가져갈 만한 것이라곤 없었다. 어머니는 지민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가면서 거의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 역시 별말 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하룻밤 머물면서 그에게 필요한 책상이나 간단한 가게도구를 사 다가 정리를 해주었다. 그 뒤에도 지민이 없을 때 한 번씩 들러서 밑반찬이나 새로 산 옷 을 갖다 놓았다. 지민은 어머니에게 어쩌다 한 번씩 내려갔는데 그날 그 사건 이후로는 다시 내려가지 않 았다. 갑자기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 추운 겨울날이었다. 집을 가려면 기차도 타고 가서도 또 버스를 타야 했다. 그렇게 해서 찾아갔을 때는 밤이 깊어 있었다. 집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그는 신발을 벗으며 어머니를 불렀다. "어머니 저, 왔어요." 그러자 안에서 부산나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상하게 느껴진 지민은 분을 벌컥 열었다. 방 안에는 어머니가 속곳 차림으로 막 저고리를 걸치려던 참이었고 방 한 구석에는 어떤 남자가 급하게 걸쳤는지 바지 단추를 아직 잠그지도 못하고 손으로 잡고 서 있었다. 어머니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지민은 방문을 쾅 하고 닫아 버렸다. 그는 길을 다시 되돌아갔다. 어머니는 저고리를 걸쳤지만 속치마 바람으로 그를 쫓아왔다. "지민아! 지민아!" 어머니가 애타게 부르른 소리가 그를 붙잡았지만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갔다. 그 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그는 소매로 눈물을 닦아 냈다. 그는 버스 터미널에서 추운 밤을 울며 보냈다. 그때가 중학교 3학년 때의 일이었다. 이제 그의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슬픔은 더욱 커져 갔다. 그러는 중에도 그는 항상 공부를 잘했다.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을 통틀어 거의 한 번도 일 등을 놓친 적이 없었다. 그 일이 있고 난 지 일주일 뒤에 어머니가 찾아왔다. 지민은 냉랭했다. 어머니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니가 나를 좀 이해해 주었으믄 좋겄구나." "저보고 어머니를 이해하라구요? 어떻게 그런 말이 그렇게 쉽게 나오는 거죠?" "지민아!" "절 더 이상 괴롭히지 마세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를 어머니로 생각해 본 적 없어요! 어머니는 저를 귀찮아하기만 했잖아요!" "니가 잘못 생각하고 잇는 기다." 어머니가 지민의 손을 잡았지만 그는 뿌리쳐 버리고 말았다. 어머니가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앉아서 밤을 새웠다. 새벽녘이 되자 지민은 졸음을 참지 못하 고 한 쪽으로 구부리고 누워 잠이 들었다. 어머니는 이불을 내려 그를 덮어 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어머니는 아침을 해서 아랫목에 묻어 두고 떠났다. 지민은 어머니를 다시 찾아가지 않았지만 나이가 들어 갈수록 어머니를 조금은 더 너그러 운 시선으로 볼 수 있었다. 이석명은 오전에 연락해서 약속한 위편호 교수를 만나려고 호텔 커피숍에서 그를 기다리 고 있었다. 약속한 시간에서 5분이 지나자 간편한 생활한복을 입고 두꺼운 검은테 안경을 쓴 위편호 교수가 나타났다. 그는 이 과장에게 공손하게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이 과장도 일어나서 고개를 숙였다. 이 과장이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제가 이석명입니다." "예, 위편호입니다." 이 과장은 먼저 차를 시켰다. "그동안 교수님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별 말씀을... . 한 일도 없는데 소문만 요란했습니다. 허허허." 이 과장이 눈을 빛내며 말을 꺼냈다. "아직 확실하게 드러난 사실은 아니지만 저희 병원에 현대 의술에 기 치료를 병행하는 친 구가 있습니다. 교수님의 업적이나 사상으로 볼 때 그 친구가 한 번쯤 찾아가지 않았나 싶 습니다만... ."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이 과장이 머뭇거리더니 결심을 한 듯 말했다. "강지민이라는 친구를 알고 있지 않으십니까?" 위편호는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말했다. "그렇습니다. 몇 번 만난 적이 있죠." 이 과장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 친구는 제 의학적인 상식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수술을 세번이나 했습니다. 현대의 학으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죠." 위 교수는 손에 든 찻잔을 달그락 소리를 내면서 테이블 위에 놓더니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시면... 기에 의한 치료 행위 자체에는 부정적이시군요." 이 과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대답을 하자면 그렇습니다." "그럼 절 만나자고 한 이유는 단지 그 친구 때문입니까?" 이 과장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불쾌하시다면 죄송합니다." 위 교수는 대수롭지 않은 듯 미소를 지었다. "그런 건 아닙니다만 제게 무슨 말씀을 듣고 싶으신 건지... ." "미국 유학중에 신세를 많이 진 친구가 있습니다. 불행히도 교수님과 비슷한 연구를 합 니다." 위 교수는 미소를 띤 채로 그를 쳐다보았다. "좋은 사례가 될 것 같아서 친구에게 줄 글을 쓰고 있습니다." 위 교수가 낮지만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 사람의 비밀을 캐서 은혜를 갚으려고 하시는군요." 이 과장이 빙긋이 웃었다. "그렇게 되는 건가요?" 위 교수는 잠시 눈을 감더니 천천히 몸을 앞으로 숙이며 두꺼운 안경 너머의 조그만 눈으 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도 결코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위 교수가 말했다. "의사들은 환자의 비밀을 철저히 보장할 의무가 잇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강지민 그 친구는 아픈 사람입니다." 이 과장은 입을 다물었다. 위 교수는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별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이 과장은 낭패스런 표정을 짓고 말았다. 위 교수는 남은 차를 홀짝홀짝 마시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이렇게 어렵게 만나 뵙게 되었는데 제가 저녁이라도 대접해 드리고 싶습니다만... ." "아닙니다. 가서 볼 일이 있습니다." 이 과장이 위 교수를 따라 호텔 로비까지 나갔다. "오늘 여기까지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인사를 나눈 다음 헤어졌다. 이 과장은 위 교수가 자신에게 협조적으로 나올 거라고 생각한 것은 혼자만의 착각이었음 을 알고 여간 실망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위치나 명성으로 보아 그리 쉽게 거절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는데도 단호하게 거절하는 위 교수에게 내심 놀랐다. 그렇지만 그는 이 과장이 싫어할 타입의 사람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확고한 주관과 의지를 가진 사람 같 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방으로 돌아가 다음날 있을 추계학회의 마지막 일정을 준비했다. 오전이면 모 든 게 끝날 것이므로 점심 시간 이전에 병원에 돌아갈 수 있었다. 이 과장은 병원으로 돌아가자마자 최 간호사부터 자기 방으로 불렀다. 그녀는 문을 열고 들어와 목례를 했다. "부르셨습니까?" "내가 부탁한 우편물 아직 못 받았나?" 최 간호사가 깜짝 놀랐다. "표 선생님께 아직 연락 못 받으셨나요?" "그 애가 왜 나한테 연락을 하지?" 그녀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미국에서 자꾸 전화가 오는데 무슨 소린지 몰라 우편물 안에 들어 있는 편지를 표 선생 님한테 보여 드렸더니 비디오도 함께 달라고 하셔셔... ." 그는 얼굴이 굳어지더니 그녀에게 말했다. "알았어요. 나가 봐요." 그녀가 나가자 그는 전화기를 들었다. 지수를 호출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었다. 노크소리가 나더니 그녀가 들어왔다. 지수는 그의 책상까지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따지고 들었다. "삼촌이 찾는 비디오는 내가 가지고 있어요. 죄송하지만 그건 못 돌려드리겠어요. 그리 고 한 가지 꼭 알고 싶은게 있어요. 강 선생 수술 장면 몰래 찍은 이유가 뭐예요?" 그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도대체 그 저의가 뭐였냐구요!" 그는 묵묵히 자신에게 따져 묻는 지수의 상기된 얼굴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도대체 강 선생 비밀을 캐서 무얼 하실 작정이었어요? 괴상한 짓거리를 하는 놈이니까 병원에서 쫓아내실 생각이셨어요? 아님, 저희 엄마 아버지더라 제가 이상한 사람을 좋아하 니까 당장 다른 사람에게 시집 보내라고 권유라도 하실 셈이셨어요? 삼촌, 제가 무슨 생각 을 했는지 아세요?" 그가 차분한 말투로 물었다. "무슨 생각을 했니?" "삼촌이 치사하다고 생각했어요. 왠 줄 아세요? 몰래 비디오로 찍어서는 자! 사람들아 봐라! 그건 내가 불가능한 수술이라고 했지? 그런데 이 애송이가 성공한 건 의학적인 지 식이니 과학적인 실험이니 그런 것하고는 다르다. 결과가 어쨌거나 나, 신경외과 권위자 이 석명은 정확하게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치료 행위에 대해서는 인정할 수도 없거니와 또한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어! 우리 병원에선 이런 행위를 용납치 못해!" 말을 마친 지수는 숨이 좀 가쁜 듯 쌕쌕거리며 이 과장을 쳐다보았다. 그가 앞에 선 그녀를 이마에 주름살을 만들며 올려다보았다. "... 그럼 내 자존심이 살아나는 거니?" "적어도 삼촌이 그만큼 신봉하는 과학의 힘이 아니란 건 증명이 되죠." "넌 도대체 왜 날 경쟁심 덩어리로 뭉친 인간으로 생각하지?" "옛날에 우리 함께 살 때 생각 안 나세요? 삼촌이 고등학교 2학년때 일 등을 한번 놓치 니까 일 등 한 친구를 집에 데려와서 맛있는 거 사줘 가며 같이 공부해서 결국 다시 일 등 을 빼앗았잖아요?" "그건 나쁜 게 아니었잖아?" "시험 전날 밤에 그 친구가 배탈이 나서 화장실만 들락거리지 않았으면요." 그녀의 말에 그는 과거가 생각나는 듯 피식 웃었다. "넌 별걸 다 기억하는구나." "아무튼 비디오 테입은 못 드리겠어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그는 서랍을 열어 뭔가 서류 같은 걸 그녀에게 던져 주었 다. 그녀가 보니 하버드 대학교 부속병원의 스페셜리스트 프로그램이었다. "뭐죠?" 그가 회전의자를 돌려 그녀에게 옆모습을 보이며 말했다. "강지민이 그 친구를 내 뒤를 밟게 할 참이었다. 여기 수련 과정이 끝나는 대로 말이야. 가능하면 너와 같이... ." 그녀는 의외의 말에 당황했다. "똑똑한 친구가 NS에 있어서 기분이 좋았어. 지수야, 세월이 지나면 사람도 좀 너그러운 구석이 생겨. 네 말대로 자존심과 경쟁심의 화신으로만 살아 가는 건 아니야." 지수는 무조건 쏘아붙이고 난 뒤라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가 다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이 친구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고 싶었던 거고 그 친구 모친한테도 내가 연락을 했지. 네 이름도 말해 주고." 그녀는 시선을 딴 데로 돌려 버리고 말았다. "내가 유학을 갈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네 부모님 적이었어. 그래서 언젠가는 신세를 갚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다행이 네가 관심 있어 하는 사람이 바로 나도 인정하고픈 친구였어. 그래서 더욱 꼼꼼하게 알아보려던 게 네 오해를 산 모양이다." 그녀는 그에게 미안해서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죄송해요." 그가 너그러운 표정으로 웃더니 말했다. "괜찮아." 그는 곧바로 웃음을 거두며 의자 뒤에서 봉투를 하나 꺼냈다. "그런데 네가 봐야 할 게 있다." 그가 봉투 안에 든 MRI 사진들을 책상에 꺼내 놓았다. "MRI실 기사가 나한테 가져온 거야. 누구 건지 모르겠는데 잠깐 촬영실을 비운 사이에 누가 찍어 놓고 갔더란다." 지수는 또다시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내가 보니까 작은 거지만 세 군데 종양이 있는데 네가 한 번 보렴." 그 역시 심각하고 혼란스런 표정으로 사진들을 그녀에게 밀어주었다. 그녀는 그가 주는 사진들을 챙겨 들고 방을 나갔다. 그녀는 곧바로 의국으로 가려다가 멈칫했다. 먼저 지민이 수술을 해 주었던 아이들의 수술 전 MRI 사진들을 찾았다. 그러고 서야 마취과 의국으로 갔다. 그녀는 긴장되어 떨리는 손으로 사진을 형광판에 걸었다. 의문의 사진들 옆에 아이들의 사진도 걸었다. 한 아이의 사진에서 뇌혈종의 위치를 짚어 보고 의문의 사진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또 다른 아이의 사진을 비교하는 그녀의 얼굴을 더욱 어두워져 갔다. 마지막에는 그녀의 얼굴에 공포와 두려움만이 남아 있었다. 지수는 멍한 표정이 되어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지민의 어머니가 던지고 간 말이 뇌리에 떠올랐다. "다신 그 짓을 못 하게 혀. 그거이 다 제 살 깎아먹는 짓인게." 그녀는 땀이 나서 손바닥을 펴서 가운의 밑자락을 잡았다. 방향 감각이 없는 사람처럼 이리로 걸었다 저리로 걸었다 걸음을 옮겼다. 혼란스러움 속 에서 뭔가가 보이는 것 같았다. 그녀는 다시 한 번의 의문의 사진을 쳐다보고는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고개를 숙이고 고민을 하던 그녀는 이내 빠른 걸음으로 문을 열고 나갔다. 11 지민은 심각하다 못해 무서운 얼굴로 병원의 복도를 빠르게 걸어갔다. 그의 입은 악다물 어져 있었고 정면을 쳐다보는 눈은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는 신경외과 의국으로 갔다. 문 을 열어 보니 호동과 현수, 그리고 몇몇 의사들이 책을 보는 둥 마는 둥 앉아 있었다. 지민이 호동에게 말했다. "오새연 환자 MRI 사진 좀 가져와!" 호동이 벌떡 일어났다. "예!" 호동이 가져온 사진을 지민이 형광판에 꽂았다. 그의 얼굴에는 다시 한 번의 절망의 그 늘이 번졌다. 그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뭔가를 생각하더니 결심한 듯 걸어나갔다. 그는 문 을 나서려다가 멈칫하며 호동에게 말했다. "과장님이랑 모두 학회에서 돌아오셨으니까 다음 주 OP스케줄 좀 잡아 줘. 그리고 김 선생, 나 좀 보지?" 현수가 그를 따라 의국을 나갔다. 지민은 현수를 사람이 뜸한 비상구 계단으로 데리고 갔다. "오새연 환자 수술을 내가 할 생각이야." 현수가 깜짝 놀라 물었다. "아직 수술을 하면 안 되지 않습니까?" "그래, 난 지금 근신중이라 수술을 하면 안 되지. 그렇지만 오새연 환자의 수술은 꼭 내 가 해 주고 싶어. 환자도 그러기를 원하고 있고. 환자는 절망적인 상태야. 내가 해야만 해. 도와줘." 현수는 곤란한 얼굴로 아래만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제가 뭘 어떻게 해 드렸으면 좋겠습니까?" "오새연 환자가 갑자기 응급 치료가 필요한 상태인 것으로 해서 밤중에 수술을 했으면 해." 현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지민이 다시 사정했다. "꼭 부탁하네." 현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지민이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앞으로 자네를 이렇게 곤란하게 만드는 일은 없을 거야." 지수는 지민을 찾으러 먼저 응급실로 갔다. 그녀의 표정은 냉랭했다. 바쁘게 돌아가는 응급실 안을 쭈욱 둘러보았지만 그는 없었다. 그대로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신경외과 데 스크로 갔다. 데스크에 있던 간호사 두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지수가 먼저 목례를 했다. 간호사 한 사람이 밝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지수는 태연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물었다. "네, 강지민 선생님 어디 있는지 아세요?" "의국에 안 계세요?" 그녀는 발길을 돌려 의국으로 갔다. 들어가니 호동이 컴퓨터 앞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가 자판기를 두드 리던 상태에서 그대로 졸았기 때문에 화면에는 'ㅇ'자만 가득했다. 지수가 그의 어깨에 손을 살짝 얹자 그가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그녀가 물었다. "강 선생님, 어디 계시죠?" 호동이 눈을 껌벅였다. "네, 의국장님요? 방금 다음 주 OP 스케줄 때문에 나가셨는데 마취과에 들르지 않았어 요?" 지수는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입술을 깨물며 의국을 나갔다. 새연은 창 쪽에 의자를 갖다 놓고 앉아 하염없이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빌딩들 사이 로 사람들과 차들이 지나가는 모습이 조그맣게 보였다. 그녀는 지민과 보냈던 한때를 생각했다. 그래도 기억나는 것 중에서는 가장 행복했던 때 였다. 그의 입술이 느껴졌다. 그녀는 얼굴이 빨갛게 변하며 자기의 입술을 살며시 만져 보 았다. 갑자기 살고 싶은 욕구가 솟구쳤다. 그녀는 방청소를 하고 있는 아주머니를 보았다. 아주머니는 침대보를 열심히 갈고 있었 다. 그녀가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아주머니... ." 아주머니는 하던 일을 계속 하면서 대꾸했다. "왜요?" "저 수술하면 살 수 있을까요?" 아주머니는 뜬금없는 질문에 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죽을 병만 아니면 살겠지요." 아주머니는 자신이 좀 너무했나 싶어 새연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창 밖으 로 시선을 돌렸다. 눈물이 나오려는 걸 애써 참았다. "에이, 씨! 데이트하지 말걸." 새연이 자꾸만 터져나오려는 울음을 억지로 삼켰다. 아주머니가 나가자 곧 이어 지민이 들어왔다. 새연은 그가 들어온지도 모르고 창 밖만 보고 있었다. 그가 그녀의 옆으로 가 섰다. "뭘 보니?" 그녀는 반가운 목소리에 얼굴이 활짝 펴지며 그를 향해 돌아섰다. 당장이라도 그의 품속 으로 뛰어들고 싶은 표정이었다. "아저씨!" 그가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너 울었구나?" 그녀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가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쥐어박았다. "운 게 분명한데, 뭐. 앞으로 내 허락 없이 울면 혼날 줄 알아!" 그녀가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 링거 주사를 놓아야 하니 가서 누워." 그녀는 군소리 없이 침대로 가더니 누었다. 그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다음 주에 네 수술 스케줄 잡아 놨어. 내가 수술 들어갈 거야. 수술하고 나면 곧 좋아 질 거야. 내가 약속할게." 그녀가 뛸 듯이 좋아했다. "정말이세요?" 그가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는 그녀의 팔목을 묶고 혈관을 찾았다. 그가 막 주사바 늘을 꽂는데 노크소리가 들리더니 대답을 하기도 전에 지수가 들어왔다. 그의 눈이 지수와 마주쳤다. 잠시 그를 쳐다보던 그녀는 눈을 돌려 새연에게 사무적인 딱딱한 투로 말했다. "잠깐 본 적 있죠? 마취과 닥터 표라고 해요." 새연이 미소를 띠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지수는 뭔가 말을 하려다가 창백하고 연약한 새연의 모습에 주춤했다. 새연은 무슨 일인 가 해서 다소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지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웬일이니?" 지수는 작심한 듯 냉랭하게 물었다. "오새연 환자 수술 스케줄 때문에... . 언제 할 꺼야?" 새연의 얼굴이 어두워지고 지민은 지수를 의아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지수가 팔짱을 끼면서 말했다. "다음 주에 CS하고 OS 수술이 많이 올라왔어. 미리 잡아 뒀으면 해서." 지민이 곤란한 듯 말했다. "나가서 얘기하지." 지수는 새연의 표정을 보고 다소 믿음을 주려는 듯 분명하게, 그리고 지민에게 들으라는 듯 말했다. "어차피 수술은 어렵지만, 그렇다고 너무 절망할 필요는 없어요. 수술은 신경외과 과장님 이 직접 하실 거예요." 지민이 못마땅한 얼굴로 지수를 쳐다보았다. 지수는 다시 그의 눈길을 피하며 계속해서 말했다. "하버드 대학에서 따로 새연 씨가 앓고 있는 병에 관한 공부를 하고 오신 분이에요. 국 내에선 최고의 전문의한테 수술을 받으실 수 있을 거예요." 새연이 지민을 쳐다보았다. 지민은 지수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는 듯 문 쪽을 향해 걸 어가며 명령하듯 말했다. "나랑 나가서 얘기해!" 지수 역시 상기된 표정으로 새연에게 목례를 하고 병실 문을 나갔다. 지민은 얼굴이 굳어진 채로 병실 앞 복도에 서서 지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민이 다가 오는 지수를 빤히 쳐다보았다. 화가 난 표정이었다. 지수는 지민을 보지도 않고 그의 앞을 지나쳐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그가 그녀를 따 라 몸을 돌렸다. "지수야!" 그녀가 계속 걸어가며 말했다. "할 말 있으면 우리 방에 가서 이야기 해!" 그녀가 걸음을 멈추지 않고 가 버리자 그는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서 있다가 어쩔 수 없이 뒤를 따라갔다. 두 사람이 병실 앞을 떠나자 새연이 문을 빼꼼히 열면서 나왔다. 두 사람의 심상치 않은 대화를 들은 그녀 역시 불안해진 것이었다. 새연은 그들이 어디로 갔나 둘러보다가 링거 병을 든 채 신경외과 의국으로 갔다. 노크를 하자 호동이 문을 열어 주었다. 그는 새연을 보자 그럴줄 알았다는 듯이 폼을 잡 았다. 그가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왜~ 애?" 새연이 쑥스러워했다. "좀... 여쭈 볼 게 있어서요." 그는 그녀가 부끄러워하자 픽 웃었다. 그러고는 선심을 쓰듯 호탕하게 말했다. "괜찮아. 난 원래 셩격이 스트레이트 한 사람이야. 그냥 편하게 얘기해." 그녀는 묘한 말에 황당해하면서 그의 느글거리는 얼굴을 쳐다보았다. "저 마취과 표 선생님이 어디 계실까요? 마취과 의국에 계실까요?" 그의 얼굴에서 느글거리는 미소가 사라졌다. "표 선생님? 물어 본다는 게 그거야?"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답답해했다. "그러니까 그게 말이야. 부끄러워할 게 없는데... . 나에 관해서는 뭐 알고 싶은 건 없 어?" 그녀가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그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실망해서 그런지 퉁명스럽게 말했다. "4층이야. 가 봐." 그녀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급히 엘리베이터로 갔다. 지수는 마취과 의국으로 들어가자마자 지민을 향해 홱 돌아섰다. 그를 쏘아보며 조용히 말했다. "말해 봐. 너 오새연 환자 수술, 네가 하려는 거지." 그 역시 차분하게 말했다. "내가 해 주기로 했어. 수술 스케줄을 밤중에 잡아 줬으면 좋겠어. 응급 수술로 말이 야." 그녀는 냉정하게 말했다. "그 계집애 수술 스케줄을 잡아 주고 싶지 않아." 그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그 애 앞에서 심한 말은 하지 말아줘. 좀 부드럽게 대해 줬 으면 좋겠어. 상처 받기 쉬운 여린 성격이야." "상처? 상처는 내가 더 받고 있어!" "너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너 답지 않게." "널 위해서 그래." "날 위해서? 너... 혹시 나한테 특별한 감정 가지고 있어서... ?" 그녀는 거의 고함을 치듯 큰 소리로 외쳤다. "그래! 그건 내가 널 좋아해서 그래. 그걸 이제 물어보니, 멍청아!" 그가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지수야... ." 그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이 나쁜 자식아! 난 네 옆에서 10년을 기다렸어! 내가 언제 다른 애랑 사귀는 거 봤 니? 내가 네 부탁을 거절한 적 있어? 그런데 뭐? 네 앞에 나타난 지 10일밖에 안 된 애 때문에 날더러 뭘 어떻게 해 달라고?" "그 애는 환자야." "그럼 규칙대로 교수님들한테 맡겨! 왜 날더라 응급도 아닌 환자의 수술을 밤에 하자고 그러는 거야?" 그는 애써 침착한 표정을 잃지 않으려고 했다. "수술을 하고 싶은데 지금은 근신 상태야." "거짓말 하지마! 너 무슨짓 할지 내가 모를 줄 알아?" 그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그녀는 이 과장이 주었던 사진들을 꺼내어 그의 앞으 로 던졌다. 사진들이 흩어졌다. "네 손에서 나오는 푸른 빛으로 애들을 살려 낼 때마다 네 뇌 속에는 아이들의 혈종이나 종양의 위치와 일치하는 부위에 그것과 똑같은 것들이 하나식 생겨!" "뭐... ?" 그녀가 결국 눈물을 흘리며 애타게 소리쳤다. "이 바보야... 걔까지 살려 내면 넌 죽어! 그 애 종양은 아이들처럼 작은 게 아니란 말이 야." 그는 비밀을 들킨 나머지 당황해서 그녀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녀의 앙칼진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네 목숨이랑 걔 목숨이랑 맞바꾸는 짓을 내가 도울 것 같아!" 그때였다. 밖에서 뭔가 팡! 소리를 내며 터졌다. 지수와 지민은 동시에 동작을 멈춘 채 놀란 눈으로 서로를 마주 봤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가 튕기듯 문 쪽으로 달려갔다. 그가 문을 열자 밖에서는 링거 병이 깨진 채 떨어져 있었다. 그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뛰 어갔다. 그러나 한 발 늦어 문이 닫히면서 새연의 얼굴이 보였다. 엘리베이터 옆에는 휠체 어가 나동그라져 있었다. 그는 비상구 계단으로 마치 날기라도 하듯 뛰어내려갔다. 계단을 올라오는 의사들이나 환자들과 부딪쳐도 개의치 않고 계속 뛰었다. 한 층 아래 도착하자 얼른 엘리베이터로 갔다. 그러나 사람들 사이에서 벽을 향해 선 채 눈물을 참으려는 듯 천장을 올려다 보고 있는 새연이 잠깐 보이고는 문이 닫히고 말았다. 그는 다시 비상구 쪽으로 뛰어갔다. 그는 1층까지 정신없이 뛰어갔다. 새연은 지민이 1층에 도착하기 이전에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사람들 사이에 묻혀 로비를 지나갔다. 잠시 후, 숨을 헐떡이며 그가 로비에서 그녀를 찾았다. 그러나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응급실로 갔다. 얼굴이 하얗게 변해서 문을 벌컥 열었다. 그는 사방을 둘러보다가 지나가는 간호사를 붙잡았다. "여기 방금 젊은 여자 환자 들어오지 않았어?" 간호사가 고개를 흔들자 그는 곧바로 밖으로 뛰어나갔다. 병원의 복도를 모두 뒤져보았 지만 그녀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응급실의 자동문을 통해 병원 바　으로 나갔다. 멀리 입구 쪽에서 앰뷸런스 한 대가 사이렌 소리를 울리며 들어설 뿐 그녀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 다. 다시 들어가려던 지민의 눈에 응급실 창가 쪽의 벽에 서 잇는 새연의 모습이 보였다. 밝은 태양빛 때문에 새연의 얼굴이 더욱 하얗게 보였다. 눈이 부신지 큰 눈을 깜박이며 가만히 벽에 기대어 선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는 곧 돌아서서 정문 쪽을 향해 걸 어갔다. 그때 위급한 환자를 실었는지 구급차 한 대가 빠른 속도로 응급실 주차장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구급차 앞으로 뛰어가는 지민 때문에 놀란 운전사가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으며 핸들을 꺾었다. 구급차가 아슬아슬하게 지민을 비켜 나가 끼이익 하는 소음과 함께 아스팔 트 바닥을 긁으며 미끄러졌다. 운전사는 울컥 화가 치밀어 차 밖으로 뛰어나갔지만 지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새연이 간 정문으로 뛰었다. 새연은 이미 그곳을 떠나고 없었다.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답답한 나머지 새연 의 이름을 크게 외쳐 부르다가 포기하고 택시 승강장으로 뛰어갔다. 그곳 역시 사람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병원으로 들어갔다. 데스크로 가서 간호사들에게 부탁을 해 놓았다. 혹시 오새연 환자에게서 연락이 오거나 보게 되면 자신에게 곧바로 알려달라고 했 다. 그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지만 응급실로 갔따. 여전히 환자는 많았다. 정신없이 환자 치료에 열중하던 그는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벌써 5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새 연의 병실로 올라갔다. 물론 그녀가 와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휘 둘러보고는 방 한가운데 꼼짝도 않고 서 있 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며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그는 그녀가 보던 만화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여러 권이 쌓여 있었다. 그는 그쪽으로 걸 어가 만화책을 만져 보았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여러 사람이 보던 것이 라 그녀와 통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려 보았다. 청초하면서도 앳된 얼굴에 슬픔과 절망이 가득하던, 희뿌연 담배 연기 사이로 보이던 그 녀의 얼굴, 그를 무심히 바라보며 피식 웃던 모습이 생각났다. 자신을 재수없는 아이라던 그 우울한 목소리도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따뜻하고 말할 수 없이 부드러웠던 그녀 의 입술, 많을 걸 주지 않았는데도 막무가내로 자신에게 애정을 퍼붓던 천진한 여자아이.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는 병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문 앞에 지수가 서있었다. 두 사람은 잠시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아무 말도 없는 지민을 바라보며 그녀가 물었다. 담담한 말투였다. "내가 잘못한 거니?" "아니." 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야, 강 선생! 근데... 나 크게 뭘 잘못한 것 같다." 지민이 인자한 눈으로 쳐다보자 그녀의 야무진 눈망울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가 두 손으로 살며시 어깨를 감싸 주었다. 그의 따스한 손길이 닿자 그녀는 알 수 없는 기쁨과 함께 설움이 복받쳤다. 그녀는 웃으면서도 울먹이는 소리로 물었다. "야, 강지민! 넌 내가 그렇게 매력이 없니? 걔가 그렇게 좋아?" 그는 입을 다문 채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주먹을 쥐어 그의 가슴을 툭 쳤다. "짜식아! 가!... 가서 걔 찾아와." 울음을 참느라 무진 애를 쓰며 웃는 얼굴을 만들었지만 금세 굵은 눈물 한 줄기가 볼을 타고 내렸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닦으며 그에게서 떨어져 나와 뒤 돌아섰다. 그가 다시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그녀가 멈취 섰다. "괜찮아." 그녀는 야무진 얼굴을 되살리며 그의 손을 어깨에서 떼어 놓고 걸어갔다.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그는 정신을 차리고 의국으로 갔다. 호동과 현수가 환자들의 입원 상태를 점검하고 있었다. 현수가 호동에게 물었다. "특실 오새연 환자가 뛰쳐나갔다면서?" "아, 예. 그게... 강 선생님하고 관련이... " 호동은 문의 맞은편에 앉아 있다가 지민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하던 일을 계속 했다. 지민은 자기 자리로 가서 앉았다. 지수가 갖다 주었던 책을 꺼내 펼 쳤다. 눈에 잘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열심히 읽으려 했다. 그가 고개를 들어 책상 위의 시계를 보니 10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이때 전화벨이 요란 스럽게 울렸다. 그는 재빨리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호동과 현수가 동시에 그를 쳐다보았 다. 지민은 긴장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신경외괍니다." 지수였다 "연락 없어?" 그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아직... ." "나... 수술실에 있을 거야." 지수가 먼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참만에야 수화기를 내려 놓았다. 지민은 벌떡 일어나 새연의 병실로 갔다. 옷장과 서랍장을 뒤져 그녀의 물건들을 모두 꺼냈다. 화장품과 장식품을 침대 위에 쏟아 놓고 그 중에서 파운데이션 케익을 집어들었다. 뚜껑 을 열어 보니 얇은 비닐이 덮인 채 한 번도 쓰지 않은 것이었다. 그것을 내려다보는 그는 눈 한 번 깜박이지 않았다. 이번에는 새연이 바른 적이 있는 립스틱에 손을 대 보았다. 뭔가가 느껴졌다. 립스틱의 뚜껑을 슬쩍 열고 손바닥에 놓은 다음 손에 차츰 힘을 주어 쥐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순 간적으로 새연이 공중 전화 박스로 비틀거리며 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병실을 나와 황급히 뛰었다. 비상구로 가서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새연은 정문을 빠져나와 정처없이 걸었다. 길 거리는 석양 때문에 온통 오랜지색으로 물 들어 있었다. 차량의 물결이 가득 메운 넓은 도로를 보며 길게 가지를 뻗은 가로수가 심어 져 있는 보도위를 걸어갔다. 새연은 너무 많이 걸어 다리에 힘이 빠져 휘청거렸다. 얼굴은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고 이마는 제법 많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보도 블록의 색 깔대로 골라 가며 발걸음을 딛던 그녀는 지수가 했던 말을 생각했다. "... 네 앞에 나타난 지 10일밖에 안 된 애 때문에 날더러 뭘 어떻게 해 달라고?" "그 애는 환자야!" "걔까지 살려 내면 넌 죽어! 네 목숨이랑 걔 목숨이랑 맞바꾸는 짓을 내가 도울 것 같 애?" 그녀의 눈 앞에 지수의 냉랭한 얼굴이 떠올랐다. "... 수술은 과장님이 직접 하실 거예요." 새연은 지민을 사랑하는 사람이 또 한 사람 있었다는 사실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왜 그에게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을까. 그를 사랑하며 살고 싶었는데... . 그 사람만 생각하면 고통도 달콤하게 느껴지고 살아야 하는 이유마저 생겼었는데... . 암담해졌다. 갑자기 새연은 눈앞에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시야가 확 좁아진 것이었다. 그녀는 당 황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머리가 아프고 구역질이 나왔다. 휘청거리며 쓰러질 것만 같아 서 가로수를 붙잡았다. 몸을 앞으로 숙이고 구역질을 했다. 옷소매로 입가를 닦고서는 다 시 걸음을 재촉했다. 딱히 갈 곳이 없으면서도 그녀는 목적지가 잇는 사람처럼 꿋꿋하게 걸어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이젠 앞을 분간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날이 어두워졌다. 그렇지만 가로 등과 오가는 차들, 거리의 네온사인으로 그리 불편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통증이 느껴지면 쉬고 어지러우면 아무거나 붙잡아 가며 걷기를 멈추지 않았다. 누군가가 앞에서 그녀를 이끌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끌리는 대로 계속 따라가다가 다다 른 곳은 바로 동물원이었다. 우리에 갇힌 늑대가 눈을 번쩍 떴다. 일어서서 쫑긋 귀를 세우고 소리나는 쪽을 쳐다보 았다. 호랑이와 기린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안에서 서성이며 무슨 소린지 귀를 귀울이는 것이었다. 그것은 새연이 굳게 닫힌 동물원의 입구에서 철장문을 흔들며 열심히 고함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얼굴과 손이 온통 땀과 얼굴으로 더럽혀져 있었다. 그녀는 목이 터져라 고함을 쳤다. "누구 없어요! 아무도 안 계세요!" 철창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동물원의 안쪽을 들여다보며 고함을 치던 그녀는 그만 목 이 잠기고 말았다. 입을 벌려 소리쳐 보았지만 갈수록 그 소리는 작아졌다. 그녀는 이제 앞을 거이 볼 수가 없었다. 미간을 찌푸려 앞을 보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를 않았다. 그녀 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녀는 꿈처럼 행복했던 지민과의 시간들을 그대로 다시 한 번 느끼고 싶었다. 초점을 잃은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사실 그녀로서는 그게 눈물인지 땀인지 구분을 할 수가 없었다. 볼을 쓰다듬어 주던 그의 손길, 웃으며 떡볶이를 받아 먹던 모습, 리프트 위에서 자신을 쳐다보며 쓸쓸한 미소를 짓던 그의 얼굴, 마지막으로 첫 키스의 순간까지... . 기억을 하나하나 더듬던 새연은 입가에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철창문 앞에 쓰러진 채로 잠든 듯 눈을 감고 있었다. 눈을 감은 그녀의 앞에 지민이 미소지으며 서 있었다. 그녀는 지민을 향해 독백하듯 이 야기했다. ... 어른이 되어서 예쁘게 화장하고 거리를 걸어 보는 게 소원이었어요. 어디든 누구랑이 든 상관 없이 그냥 햇빛만 따뜻하길 바랬는데... . 아저씨, 처음 나와 마주친 날 기억나요? 아저씨랑 데이트 하고 나서 너무너무 두려웠어요. 그것이 꿈이어서 깨어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 말이에요. 수술하고 마취가 깰 때면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들이 꿈으로 나타 나곤 했었거든요. 아저씨, 그 언니 말대로 아저씨가 절 살려 내면 대신 아저씨가 죽어야 하 는 건가요? 그거, 거짓말이죠, 그렇죠? 만약에 그게 정말이라면... 너무한 거예요. 그 말이 틀릴 거라고,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싶은데, 혹시나 하는 생각 때문에 아저씨가 나 수술하는 거 싫어요. 만약 그 언니 말이 맞으면 어떻해요? 난 내가 살아 있는 것보다 아저씨가 살 아 있는 것이 더 행복해요. 그녀는 아무런 대답이 없는 지민을 보고 그에게 손을 뻗었다. 일어나서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그는 그녀가 가까이 다가가는 것만큼 더 멀어져 갔다. 그녀는 그제서야 그것이 환 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정신을 차린 그녀는 자신이 없어진 것을 걱정하고 있을 지민의 얼굴이 떠올랐다. 주위를 둘러보니 근처에 공중전화 박스가 보였다. 그녀는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렇지만 한 발자국 떼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다. 몇 발자국 걸어가다 그 자리에 넘어지고 말았다. 다시 얼어서고 걷기를 몇 번, 그녀는 전화기 앞에 섰다. 수화기를 들고 동전을 넣자 뚜-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버튼을 누르다 말고 수화기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힘겹게 공중전화 박스에 기대어서 있었다. 초점을 잃은 눈 에서는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저씨, 나 이제 눈이 잘 안 보여요. 눈이 안 보이는 건 아무래도 하느님이 벌 주시는 것 같아요. 아저씨하고 있을 때처럼 행복한 시간을 평생토록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벌 받는 거에요. 너무 욕심이 많아서... . 그렇지만 딱 한 번 그런 건데... . 응급실로 뛰어간 그는 대기하고 있는 구급차가 있는지 알아보았다. 한 대도 없었다. 그 는 몸이 달아 안절부절 못했다. 그가 느낄 수 있는 새연의 상태는 상당히 위험한 지경이었 기 때문이었다. 그는 인턴에게 소리쳐서 당장 들어올 수 있는 구급차가 없는지 연락해 보 라고 했다. 인턴이 연락을 하고 있는 사이 다행히도 구급차 한 대가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내며 병원 안으로 들어왔다. 지민은 구급차에서 환자를 내리자마자 운전수에게 새연과 함께 갔던 동 물원으로 가자고 했다. 그의 눈에 보인 것으로 봐서는 그 근처의 공중전화가 틀림없었다. 구급차는 터져나오듯 병원 문을 빠져 나왔다. 지민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조수석에 앉아 시계를 보았다. 그리고 운전기사에게 고함을 쳤다. "빨리 가세요! 늦으면 생명이 위독합니다. 이제 열아홉밖에 안된 어린 소녀라구요!" 영문을 모르는 운전기사는 자기에게 죽음이 닥쳐오기라도 한 듯 초조한 지민을 힐끔거리 며 엑셀을 밟아 댔다. 구급차는 복잡한 시내의 차량을 뚫고 전속력으로 질주했다.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내는 구급차의 무서운 기세에 눌려 차들이 슬슬 길을 비켜 주었다. 구급차가 동물원에 도착하자마자 지민은 차에서 내려 공중전화 박스를 찾았다. 150미터 쯤 되는 거리에 하나가 보였다. 지민은 그쪽으로 부리나케 뛰어갔다. 그러나 어떻게 된 영 문인지 전화 박스엔 아무도 없었다. 지민은 당황해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지민은 고개를 떨구고 한참을 그곳에 서 있었다. 운전기사는 혼자서 구급차로 되돌아온 지민을 보고도 아무 소리를 하지 못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허탕을 쳤다고 투덜거리고 난리법석을 피웠을 것이지만 너무나 침통해 있는 지민 을 보고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수는 수술실에서 이것저것 마취 절차를 밟고 있었다. 마위가 끝나자 그녀는 의자에 앉 았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 아무리 수술이 잘 되어도 마취의사들은 수고했다는 말 한 마디 들을 기회가 없어요. 다들 우리를 수술하는 의사들 보조쯤으로 생각하거든요. 뭐... 그런 건 사실 마취과를 선택하 기 전부터 알던 사실이니까 별로 기대도 않았어요. 지수는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제가 기대했던 게 무엇이었는지 아세요? 그 친구가 어딘가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 을 보는 게 제가 가장 행복을 느끼는 순간이에요. 멋있잖아요. 대여섯 시간씩 수술하고 나 서 환자나 보호자들한테 고맙단 말 안 들어도 친구가 나한테로 와서 "수고했어. 저녁은 그 냥 사먹고 들어가자"... 지수는 기어이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그 생각만 하면... 아니 그렇게만 됐으면 했는데... . 다 틀린것 같아요. 12 복도에서 누군가가 오는 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일어섰다. 그녀가 이야기를 하고 있던 맞 은편에는 이미 한참 전에 마취된 40대 여자 환자가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그녀는 마취 기계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간호사들이 들어와 능숙하고 빠르게 수술 준비를 했다. 초록색의 수술복을 입은 의사들 도 하나 둘씩 드러와 환자를 둘러쌌다. 40대 여자 환자의 수술은 네 시간이 걸렸다. 수술 시간 동안 지수는 다른 때와는 달리 안절부절 못하고 왔다갔다 하거나 내리 한숨을 쉬어서 집도를 하는 의사에게 주의를 받았다. 지수는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자신답지 않 은 자신에게 화가 났다. 수술을 끝낸 의사들이 방을 가가기가 무섭게 그녀는 인터폰 쪽으로 가서 버튼을 누르려다 멈칫했다. 그러고는 수화기를 그냥 내려놓았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수술실을 나갔 다. 그녀는 생각에 잠긴 채로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자기 차를 향해 걸어가다가 주차된 차들 사이에 누군가가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다가가 보았다. 새연이었다. 축 처진 채로 바 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녀는 놀라서 달려갔다. 새연을 부축해 일으키려고 해보았지만 헛일이었다. 새연의 얼 굴은 몹시 창백해져 있었고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지수는 혼자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응급실로 뛰어들어갔다. 그녀는 아무한테나 대고 소리를 질렀다. "응급 환자예요! 이쪽이에요!" 인턴 두 사람이 스트레치카를 들고 달려왔다. 새연은 스트레치카에 눕혀진 채로 수술실로 급히 옮겨졌다. 그때 숨이 턱까지 차 오른 지민이 나타났다. 그는 헉헉거리며 수술실로 뛰어들어 갔따. 곧이어 이 과장이 바로 수술로 들어갔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극도의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수술이 진행되었다. 실내는 환자의 상태를 체크해 주는 소리 이외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취과 과장과 지수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두 사람의 간호사들이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지만 재빠르게 이 과장이 주문하는 수술 도 구를 건네 주고 있었다. 대형 현미경에는 두 쌍의 아이피스가 붙어 있었다. 집도를 하는 중간 아이피스는 이 과 장이 들여다 보고 있었고 오른쪽에 나 있는 아이피스에는 지민이 눈을 대고 있었다. 지민 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스코프의 몸체에서 연결된 선을 따라가자 수술실 구석에 3대의 모니터가 켜져 있었고 현 수와 호동이 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모니터 안에는 얇은 뇌막을 벗겨 내고 조심스럽게 탐침을 넣고 있는 이 과장의 손끝이 보였다. 지수는 긴장한 눈으로 심전도계와 뇌파 측정기 등을 비롯한 각종 계기판을 번갈아 가며 보고 있었다. 뇌 속 깊숙히 파들어 가자 조그만 혈관들이 터지며 피가 흘렀고 지민의 손이 재빨리 석션 기를 갖다 댔다. 이 과장의 눈이 파르르 떨리는 듯싶더니 드디어 모니터 화면 속에 사고로 생긴 듯한 혈정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석명은 능숙하고 조심스럽게 석션기를 집어 넣어 혈정을 뽑아냈다. 그는 다시금 조심 스럽게 뇌의 구조물 속을 헤치고 들어갔다. 지민은 조심스럽게 수술실을 나왔다. 그는 벽에 기대어 서서 한곳을 응시했다. 자신에게 수술을 부탁하던 새연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순간 그는 코에서 뭔가가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세면대로 가서 거울을 보았다. 코에서는 피가 흐르고 번뜩이는 눈은 충혈되어 자신의 얼굴인데도 섬뜩함이 느껴졌다. 수술실에 걸린 시계는 3시를 넘기고 있었다. 다른 혈정 하나를 더 제거한 이 과장이 아 이피스에서 눈을 떼자 모두들 그를 쳐다보았다. 지수는 개스 밸브를 잡더니 천천히 개스를 주입시켰다. 모니터의 숨골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는 박동이 포착되고 흑갈색의 종양이 모습을 드러냈 다. 수술실의 스탭들은 일제히 모니터를 쳐다보고 그 크기에 놀라서 서로 마주 보았다. 이 과장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이 과장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시야 좀 확보해 줘!" 현수가 간호사에게 건네받은 바늘이 없는 주사기로 조직 사이에 식염수를 뿌리자 핏물이 엷어졌다. 현수는 손에 석션기를 들고서 엷어진 핏물을 빨아들였다. 화면에 깨끗한 뇌조직이 드러났다. 이 과장은 끝이 아주 미세하고 구부러진 핀셋을 손에 쥐었다. 그러나 그는 핀셋을 도로 간호사에게 주었다. "글러브!" 옆에 있던 간호사가 재빨리 그가 낀 장갑을 벗기고 선반에서 새 장갑을 꺼내어 끼워 주었 다. 간호사는 이 과장의 손에 다시 그 핀셋을 놓아 주었다. 이 과장은 바늘 같은 핀셋의 끝으로 연두부 같은 뇌의 조직 사이를 지나갔다. 드디어 핀 셋의 끝이 종양덩어리에 닿았다. 다들 마른 침을 삼켰다. 이 과장의 손끝이 잠시 떨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규칙적으로 울려 대던 신호음이 요란하고 불규칙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모두들 초긴장 상태였다. 지수가 긴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트레이트가 떨어집니다." 마취과장이 말했다. "상태가 너무 나빠요. 잠깐 중단해 주세요." 이 과장은 더 이상 손대지 않은 채 서 있었고 지수와 마취과장은 강심제를 투약하고 산소 의 양을 늘려 주었다. 그러나 신호음은 더욱 불규칙하게 울리고 있을 뿐, 호전될 기미가 보 이지 않았다. 이 과장이 지수를 쳐다보았다. "Sa02가 거의 바닥입니다. 혈압도 너무 낮습니다." 이번에는 그가 마취과장을 쳐다보았다. 그 역시 고개를 가로젓고 말았다. 지수와 마취과 장이 다시 한 번 약물을 투입하고 개스관을 조절했다. 그때 갑자기 심전도에서 삐- 하는 소리가 났다. 지수의 당황한 목소리가 실내를 울렸다. "이런! 심장이 멈췄어요!" 마취과장이 환자 가까이 다가갔다. 현수가 스코프를 치워 주었다. 지수가 새연을 덮고 있는 선반과 수술 도구를 치워 버렸다. 옆에 서 있던 간호사가 밀려 내려가고 새연의 얼굴 이 드러났다. 그녀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새하얘져 있었다. 마취과장이 그녀의 가슴을 쳤 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가 진땀을 흘리며 외쳤다. "제세동기!" 지수에게서 제세동기를 건네 받은 그가 다급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물러서!" 모두가 뒤로 물러나자 새연의 가슴에 양극을 갖다댄 마취과장이 버튼을 눌렀다. 퍽! 하 는 소리와 함께 새연의 몸이 튀는가 싶더니 다시 삐-삐- 하는 일정한 신호음이 떨어졌다. 그가 지수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뇌파 측정기의 시그널을 보고는 가망이 없음을 알고 고개 를 떨구었다. 그때였다. 수술실 안으로 지민이 들어왔다. 그는 이 과장과 눈이 마주쳤다. 지민의 호소하는 듯한 눈길에 이 과장이 고개를 끄덕이고 수술실을 나가 버렸다. 수술대 쪽으로 다가온 지민은 새연을 내려다보았다. 마취에 취한 그녀의 모습은 마치 평 화롭게 잠들어 있는 모습 같았다. 마스크속에서 지민의 호흡이 가빠지고 있었다. 그가 지수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그가 무얼 하려는지 알고 그의 눈길을 피해 버렸다. 그러나 그는 목석처럼 움직 이지 않은 채 그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그녀의 허락이 꼭 필 요한 사람처럼... . 그의 눈은 너무나 다급하면서도 슬픔이 가득했다. 잠시 고개를 숙이고 체념하는 표정이 된 그녀에게 그가 다가왔따. 서로 마주 보며 섰다. 그녀가 그를 보던 눈길을 아래로 떨어뜨리며 체념하듯 픽 웃었다. "강 선생... 내가 왜 널 좋아하는지 아니?" 그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뿐 대꾸가 없었다. "넌 아마 내가 새연이었더라도 네 목숨하고 맞바꾸는 짓을 할 인간이야... ."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그를 올려다보는 그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해... . 넌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의사잖아!" 그도 눈에 물기가 어린 채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 과장은 수술실에서 나가 수술복도 벗지 않은 채 곧장 자기 방으로 갔다. 그리고 의자 에 앉아 몸을 뒤로 제꼈다. 온몸에 물이 젖은 솜처럼 축축 늘어졌다. 그는 그렇게 꼼짝을 않고 있다가 벌떡 일어나 컴퓨터를 켰다. 모니터에 불이 들어오고 빠른 속도로 윈도우 화면이 떴다. 그이 손길대로 커서가 움직이 더니 문서 파일이 보였다. 그 중에서 'Dr.K'라고 쓰여진 곳을 클릭했다. 파일이 열리자 영어로 잔뜩 쓰여진 문서가 화면 가득 빽빽했다. 맨 첫 페이지로 가니 영어 제목으로 <기에 의한 치료 행위의 대체의학으로서의 가능성과 그 사례 연구>라고 쓰여 잇고 몇 줄 아래에 다시 라는 소 제목이 눈에 띄었다. 그는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커서를 움직여 '모두 선 택'을 눌렀다. 다시 커서를 움직여 '지우기'를 눌렀다. 그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클릭을 하자 파일 전체가 삭제되었다. 그는 컴퓨터를 끄고는 의자 깊숙히 뒤로 기댔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지민의 양손이 새연의 두개골을 감쌌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고 기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에 푸르스름한 빛이 반사되었따. 이와 동시에 수술실의 전원이 사그라들어 전등이 곧 나갈 것 처럼 깜박였다. 계기판에서는 불규칙한 신호음이 발 생되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스탭들이 뒤로 물러섰다. 지민의 이마에서 땀이 흐르기 시작하다가 갑자기 푸른 빛이 팍! 하고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는 다시 상체를 구부리고 온몸의 에너지를 모아 새연의 머리 에 빛을 주입했다. 또다시 그녀의 머리 주위로 파란 불빛이 이는가 싶더니 곧 사그라 들고 말았다. 지수도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의 귀에 가날픈 새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 그러자 마세요." 그러나 지민은 마스크를 풀고 모자를 벗어 버렸다. 머리카락이 거의 반백이 되어 있었다. 모두 그의 머리를 보고 뒤로 넘어질 것 처럼 놀라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는 다시 한 번 새 연의 머리에 손을 갖다 댔다. 기도를 하듯 이를 악물고 마지막 힘을 모아 보는 그의 손에 서는 심한 경련이 일어나기만 할 뿐 아무런 빛도 내지 못했다. 새연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 저, 괜찮아요. 전 세상에서 꼭 필요한 것은 가지고 가니까요." 그의 몸이 온통 땀으로 젖고 말았다. 그는 싸우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두 눈을 부릅뜬 채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해 보았다. 그의 눈앞에 쓰러져 죽어 있는 동생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누구든 죽게 내버려 둘 수 없게 마드는 힘은 몰론 그의 휴머니즘에서이기도 하지만 근 본적으로 동생에게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동생을 떠나 보내지 않고 가슴에 묻어 둔 그의 잘못이었 다. 그는 나지막히 기도하는 음성으로 외쳤다. "정민아!... 마지막이야!" 있는 힘을 다해 기를 모으는 그의 손바닥에 파란 불꽃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내 불꽃은 사그라들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그는 스르르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지수와 스탭들 이 놀라서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때 누워 있는 새연에게서 그녀의 영이 일어났다. 환자복을 입고 머리가 긴 모습이었다. 수술대 위에 누워 있는 새연은 파란 입술을 한 채 그대로인데 영은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 럼 수술대를 내려왔다. 지수는 몸을 일으켰다가 그것을 보고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그녀는 영의 눈과 마주쳤다. 새연이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지수는 얼어붙은 채 벽에 붙어 서 있 었다. 새연의 영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잇는 지민에게 가다갔다. 지수는 영에게서 눈을 뗄 줄 을 몰랐다. 다른 이들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지민을 둘러싸 고 응급처치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영은 애처로운 눈길로 한참 동안 지민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서서히 그에게로 몸을 굽 히더니 그의 파랗게 질린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영은 그 자세 그대로 엎드리며 그의 몸 속으로 들어갔다. 그의 몸에서 약간의 경련이 일 어났다. 그러나 이내 잠잠해지고 그의 몸속으로 들어갔던 영이 몸을 일으켰다. 영은 갓난 아이를 품에 안고 있었다. 아기는 지민의 환상 속으로 항상 찾아들었던, 고름을 흘리며 죽어 있던 동생의 모습 그대 로였다. 지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 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새연도, 갓난아이도 모두 지민의 마음을 지배하던 사람들 아닌가. 아기를 안은 새연의 영이 다시 한 번 지수와 눈을 맞추었다. 그리고 다소곳이 고개를 숙 였다. 지수는 마스크를 풀었다. 그녀에게 뭔가 한 마디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마침내 영이 지민을 슬픈 눈으로 내려다보며 방에서 떠나려 했다. 서서히 입구 쪽으로 가는가 햇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벽을 통과해 사라졌다. 벽으로 사라져 가면서 마지막으로 지민에게 눈길을 보내는 영의 눈가에 반짝하고 이슬이 맺혔다. 지수는 눈을 감고 말았다. 움직이고 싶어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새연의 슬픈 눈을 보았 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 그녀의 온몸에 마비된 듯싶었다. 눈을 감고 있는 그녀의 귀에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마치 다른 세상의 소리인 양 아 득하게 들렸다. 새연의 시신은 영안실로 옮겨지고 지민은 정신을 한 번 차리고도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지수는 지민의 머리맡을 떠나지 않았다. 그동안 죽은 동생을 가슴에 안고 사느라 지치고 힘들었을 그가 가여웠다. 어린 시절부터 동생의 죽음을 가슴에 묻어 두고 결국은 동생 같은 어린아이들을 살려 낸 그에게 이제는 평화가 찾아들게 되었으니 다시는 그로 하여금 메스를 들지 못하게 하고 싶 었다. 그와 그녀에게 안식을 선물한 새연에게 감사하고 싶었다. 아마 그도 이제는 동생 대신 새연을 가슴 한켠에 묻어 두고 살 것이다. 그렇다고 그녀가 질투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새연은 그녀에게 사랑을 되찾게 해 준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이틀 동안 내리 잠만 자던 지민이 눈을 떴을 때 지수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 다. 다시는 못 볼지도 몰랐던 그를 보고 있자니 설움이 복받쳤다. 혼자 애태우며 그를 지켜보았던 10년이라는 세월이 그녀를 짓눌러 울음이 그치지 않았다. 그는 새연에 대해서는 물어 보지 않았다. 어쩌면 긴 잠을 자는 동안 그녀를 만나고 온 것일지 모른다. 평온해 보였다. 지수가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그가 그녀의 손을 들어 자기의 입술에 가져갔다. "고맙다." 그 말을 들은 그녀는 그를 잡은 손에 힘을 꼭 주었다. 새연의 장례식을 조촐하게 치러졌다. 조문객도 별로 없었고 누구 하나 제대로 울어 두는 이도 없었다. 지민은 아직 몸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어 휠체어를 탄 채로 잠깐 참석했다가 바로 병원으로 돌아갔다. 지수는 끝까지 지켜보며 그녀의 명복을 빌었다. 퇴원하는 날 밤, 그는 짐을 땡겨 주는 지수를 뒤에서 꼭 껴안았다. "이제 남은 인생은 너와 함께 하고 싶어." 그녀는 자신의 허리를 둘러 안고 있는 그의 팔을 꼭 잡았다. 그대로 창 밖을 보고선 그 녀의 눈에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새연이 그녀에게 미소짓는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에필로그 의과대학 강의실에서 영사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의실 안은 칠흑같이 어두웠 고 영사기가 비춰지는 곳만 환했다. 잠시후, 영사기가 멈추고 창가에 앉은 학생들이 검은 커튼을 열어 젖히자 따스한 봄햇살이 강의실 안을 가득 메웠다. 교단에는 강지민이 서 있었고 아직 스크린에는 MRI사진이 한장 비추어지고 있었다. 그 가 스위치를 누르자 그림자가 사라졌다. 교실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 웅성거리는 학생들 에게 그가 밝고 건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중간고사는 모두 슬라이드로 땡시험을 칠 거니까 알아서들 준비하기 바랍니다." 학생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더 커졌다. 한 학생이 손을 번쩍 들고 질문을 했다. "총 몇장이나 됩니까?" "500장 중에서 열 장만 고를 거니까... 열심히들 공부해." 학생들이 우와! 소리지르며 엄살을 피웠다. 지민이 슬라이드를 챙기면서 물었다. "다른 질문들... 없죠." 이때 한 학생이 짧게 외쳤다. "어, 나비다!" 지민이 고개를 들자 교실에 조그만 노랑나비가 한 마리 들어와 있는게 보였다. 지민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조그만 노랑나비는 팔랑거리며 학생들의 머리 위를 지나 지민에게 로 날아갔다. 그는 나비를 향해 빙그레 웃었다. 그가 복도를 걸어 나가는데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던 지수가 웃고 있는 그를 발견하고는 물었다. "왜?" "새연이가 왔어." 지민의 말에 지수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노랑나비는 아직까지도 지민의 주위를 맴돌며 팔랑거리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지수가 잔잔한 미수를 띠었다. "정말이네... ." 나비가 두 사람의 머리 위를 지나 밖으로 날아갔다. 이를 쳐다보고 있던 그가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 닥터 임이 뭐래?" 지수가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졌다. "응... 4주째래." 그가 다정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며 어깨를 안았다. "그래? 가자, 내가 맛있는거 사줄게." 두 사람은 나란히 현관을 걸어나갔다. 현관 처마 끝에 앉아 있던 노랑나비가 그들을 축하해 주려는 듯 다시 날갯짓을 하며 하늘 로 올랐다. 대학 건물을 벗어나 큰길가로 접어들 때까지 나비는 그들을 따라 날아갔다.